대곡천 일원 옛 풍광 사실적 표현
지역 사학·문화예술계 해석 분분

 

겸재 정선, 혹은 그의 손자 정황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언양 반구대’ 그림이 최근 재조명(본보 1월20일자 1면 게재)됐다. 존재 자체만으로 주목을 끌었던 이 그림이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사를 연구하는 사학계와 창작소재 개발에 몰두해 온 문화예술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작품 속에는 갈지(之)자 대곡천을 중간에 두고 왼편으로는 솟아오른 절벽(반구대)과 그 아래 몇 채의 건축물이, 오른편으로는 2채의 건축물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왼편 다수의 건축물을 두고 애초에는 ‘여러 채의 가옥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정도로 해석됐으나,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이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신 관장은 최근 울산문화원연합회의 향토사연구지 울산지역문화연구(제4호)의 논문(조선시대 언양 반구서원에 대한 일고찰)을 통해 ‘반구서원은 원효대사가 머물며 저술활동을 했던 반고사 터에 건립됐다’고 밝힌 바 있다. 오랜 연구를 통해 지금의 반구대 절벽 아래에 반고사 터가 있었다고 주장해 온 신 관장은 그림 속 ‘여러 채의 가옥’이 바로 ‘반구서원’ 일 가능성이 있다고 피력했다.

 

신 관장은 좀더 깊은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고 전제한 뒤 “그림 속 건축물의 숫자와 배치도를 가늠할 때 서원으로 진입하는 출입문, 원생들이 독서하던 동재와 서재, 부속건물인 장판각 및 장서각,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베푸는 사당 등 조선조 서원의 구조물과 꼭 닮아있다”고 말했다.

건너편 집청정은 반구서원 창건 이후 1년 만인 1713년 세워졌고 반구정으로도 불렸다. 이 일대를 찾았던 경주출신 화계 유의건은 <반구암기>에서 경주의 제일 기이한 경관으로 이 일대를 소개할 정도였다. 찾아오는 손님이 차고 넘치니, 이후 경주부윤 조명택은 집청정 손님을 분산배치하기 위해 1742년 반구암을 건립하기도 했다. 울산이 아닌, 경주부윤이 이 곳에 암자를 지은 것은 당시만해도 대곡천을 사이에 두고 반구대와 반구서원은 언양 고을에, 집청정은 경주에 각각 속했기 때문이다.

신 관장은 “반구암의 위치가 아직은 밝혀진 바 없다”면서도 “집청정으로 추정되는 그림 속 건물 옆에 또다른 부속 건물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경주부윤이 지었다는 반구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림 한 장으로 밝혀지는 새로운 이야기는 이밖에도 무궁무진하다. 지금은 사연댐 때문에 물길이 막혔으나, 당시만해도 대곡천을 타고 무수한 고깃떼가 회귀했던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울산부사 권상일의 <청대일기> 중에는 반구서원와 반구대 방문길을 언급하며 ‘집청정 앞 시내가 물고기를 낚기에 적당하기 때문으로… 매년 봄철과 여름철에 황어와 은어가 많이 올라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곡천의 풍부한 물고기떼는 이만부의 <반구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물 가의 수많은 바위 이름을 읊는 중에 ‘관어대’(觀魚臺)를 언급하기도 했다.

신 관장은 “반고서원은 창건 이후 반구서원으로 함께 불려졌다. 반구대가 명성을 얻어 반구서원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후 서원은 반구대·집청정과 함께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고, 서부울산의 대표 방문지이자 문학창작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b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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