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보사거리 차지연作 - 유년시절의 기억, 그 기억 속의 공간을 통해 기억을 그려낸다. 시간이 누적된 공간 안에 시간의 주체인 인간이 존재한다. 그는 나, 또는 많은 기억들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또다른 사람들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본래의 제목을 찾은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읽고 난 후, 비틀즈를 다시 들으며 망연한 젊음의 한 시기를 떠올리던 기억은 늘상 그렇듯 길을 잃고 그 동네로 돌아간다. 그 동네, 경상남도 울산시 신정2동, 이제는 없는 동네. 그러나 당시에는 없어질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그 시절의 흔하디흔한 동네.

유년기 추억으로 떠올리는 ‘그동네’
그시절 어른들한테 자연스레 배웠던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그립다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처럼
다시 그 적절한 거리를 되짚어보고파

국민학교 1학년 입학 무렵 이사 가서 졸업할 무렵 떠났던 그 동네, 잘생기고 어여쁜 얼굴은 눈 씻고 찾아 봐도 없었고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작업복을 입고 돌아다니던 동네, 아들이 나면 잘 키워 육사를 보내라고 덕담하고 딸이 나면 곱게 키워 미스코리아 시키라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 수도세나 전기세가 나오는 날에는 꼭 어느 한 집에서는 다툼으로 목청이 커지곤 했던 동네, 나지막한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지병까지 알고 담 너머로 걱정스런 목소리로 챙기던 동네, 마을에 단 하나 있던 ‘슈퍼집’ 과부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미국에 있다고 꼴사납게 으스대고 다니면서 가끔은 낯선 장난감을 꺼내들고 아버지가 보내준 거라고 자랑하기도 했지만 동네 아이들 그 누구도 아비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고 아이의 그릇된 믿음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던 동네.

사람 사는 세상의 도리를 몸소 보여주던 그 동네의 아비들은 기꺼이 ‘슈퍼집’ 전기도 고쳐주고 선반도 수리해 주고는 작은 사례에도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나오곤 했다. 주정뱅이 홀아비의 어린 아들을 위해 약속이라도 한 듯 아침마다 무심히 상 위에 밥그릇 하나 더 올리고 ‘계란 후라이’ 하나 더 부치고는 얼른 가서 깨워 오라고 재촉하던 그 동네의 심성 고운 어미들. 집성촌 보다 서로의 나이를 더 잘 알고 언니며 아우라고 부르던 정다운 발성들. 필요한 물건은 사 쓰는 대신 서로 빌려 쓰고 헐한 과일은 몇 상자씩 이고 지고 와서는 펼쳐놓고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나누던 사람들, 그러나 겨울이면 각자의 집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인 연탄을 꼬박꼬박 눈어림해 둘 수밖에 없던 사람들.

추억은 불연속성에서 발생한다. 여전히 있는 것들에게서 추억은 발생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이름을 불러주고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아이가 옆에 없는 사람들이 늘면서 TV는 아이들을 보여주고 우리는 그 모습에 열광한다. 서로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나눠 먹을 사람 사이의 간격이 멀어지면서 우리는 함께 식사할 사람을 찾는 대신 TV나 인터넷에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웃음 짓는다. 온 동네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불렀고 어느 집에서 오늘 저녁에는 뭘 먹는지 알던 그 동네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지금은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재개발로 사라지고 그 곳에 살던 이들도 어딘가에서 남들처럼 살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그 시절의 평범함이 나는 문득 그립다.

그 시절의 알전구들처럼 흔하디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지만 알전구가 만들어내는 조도 낮은 불빛처럼 은은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던 그 어른들은 지금의 나 보다 가난하고, 나 보다 어렸다. 새 것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고 낡은 것들을 서로 물려주고 물려 입던 동네였지만 불행히도 그 따뜻함은 대물림 되지 않았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그렇듯 물론 그 동네의 사람들도 서로에 대해 험담을 했고 그 험담이 빌미가 되어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고 채무관계로 인해 자주 속상해했으며 모든 계는 계주가 도망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으며 밤사이 누군가가 다른 집의 연탄을 몰래 훔쳐가다가 걸려 망신을 당하기도 했으며 옆집과 앞뒷집을 챙기는 시간 보다 우리 집의 것을 챙기는 것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 동네는 유년시절 내게 국어나 수학 대신 세상을 가르쳐 주는 교사였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저 하루가 훌쩍 흘러가게 만드는 풍부한 표정을 지닌 교사였다. 나는 그에게서 관계 맺는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배웠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동네의 모든 어른들이 교사였고 경찰과 검사였으며 선생이었다. 잘난 것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잘하는 것은 꼭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기심은 있었겠으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쓸데없이 오지랖 넓고 간섭하기 좋아하는 어른들이었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에 대해서, 지나치게 좁은 거리가 불러오는 불편함과 먼 거리가 불러오는 무심함의 사이에 항상 그들은 머물렀고 그 동네에 사는 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절묘한 자리 잡기를 은연중에 배웠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무와 숲이 있지만 같은 나무와 같은 숲도 없다. 그리고 건강한 숲은 나무들 사이의 적절한 거리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걸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지 그 숲을 다시 한 번 걷고 싶은 것이다.

 

 

■ 차지연씨는
·2010 행복한 그림, 부산 맥화랑
·2009 부산국제아트페어, BEXCO
·2009 일본현대미술교류전, 갤러리H
·2009 ASIAF-아시아청년작가미술축제, 옛 기무사,
·2009 울산대 서양화과 졸업전 ‘두고 보자’, 울산문예회관

 

 

 

 

 

 

 

■ 정창준씨는
·시인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현 수요시포럼 동인
·현 무거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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