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6)8대 총선과 최형우 등극

▲ 8대 의원 시절 김영삼 총재로부터 ‘한국문제연구소’ 책임자로 임명된 최형우 의원(오른쪽)이 김 총재로부터 조직 운영과 관련된 설명을 듣고 있다.

8대 울산 총선의 특징은 최형우 의원의 등극이다.

1971년 5월 치러진 8대 총선은 이 보다 한 달 전인 4월 실시된 7대 대통령 선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7대 대선은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이 무리한 3선 개헌을 한 뒤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맞붙었기 때문에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투표결과 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울산은 개표과정에서 부정이 많이 나타나 시민들이 여당인 공화당을 외면했다. 따라서 8대 총선에서는 정치경험이 없고 자금과 조직에서 열세였던 최형우 후보를 당선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울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로 정부 지원을 많이 받아 여당 지지세가 높았다. 특히 신민당 울산지구당은 8대 총선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7대 총선에서 낙선했던 최영근 의원이 갑자기 제일생명 사장으로 가는 바람에 사고지구당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 선거에서 최 후보가 승리할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투사적 기질 선거에 도움
5대총선 김택천 후보 돕다 죽을고비
1969년에 3선개헌 반대운동 벌이다
중정부에 잡혀가 모진고문 당하기도

울산 선거명사들 도움받아
3선개헌반대투쟁위 선전부장 이일성
심완구·박임근 등 나서 선거때 지원

유신으로 계엄군에 연행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주도 유신으로
당원들까지 체포, 엄청난 고문 당해

최 후보도 8대 총선을 9대 총선 출마를 위한 예비 선거 정도로 생각하고 뛰었다. 그의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는 당시 선거에 임하는 최 후보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가 신민당 공천을 받고 입후보 했을 때 아무도 나의 당선을 믿지 않았다. 형님과 사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님과 가족 모두가 내가 출마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조상들의 산소도 찾아볼 겸 고향에 들려 문안을 드리면 아버님부터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그 밖에 친지들도 내가 입후보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면서 선뜻 도와줄 용기를 내지 않았다. 그 때 나는 36살이었다. 중앙당에서도 나의 당선을 믿지 않았다. 오직 김대중씨만 직접 울산까지 와 나를 격려해주며 선거자금을 주었다. 이처럼 불리한 입장이었던 나는 비교적 일찍 울산에 내려와 선거운동을 했다. 아내도 서울에서 운영했던 한식당 가호정을 정리하고 울산에 와 선거운동을 도왔다. 아내가 울산에 내려온 것은 정확히 1970년 12월31일이었다. 그날 나는 울산에서 가진 망년회에서 처음으로 당원들에게 아내를 소개했다. 이렇게 되자 아내도 자연스럽게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몇 가지 요인으로 분석된다.

우선 그의 투사적 기질이 선거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울산시민들은 무리한 3선 개헌을 통해 당선된 박 대통령을 견제할 인물을 요구했다. 최 후보가 선거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대학 시절인 3대 총선 때 김택천 후보를 도우면서다.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를 다녔던 그는 정해영 의원이 서울에 건립한 동천학사에 머물 때부터 선거판을 기웃거렸다. 그는 김택천씨가 민주당 후보로 울산에서 출마했을 때 맨몸으로 그를 도우며 야당 투사의 기질을 보였다.

5대 총선에서도 김택천 후보를 도왔던 그는 개표결과 김 후보가 정해영 후보에게 밀리자 정 후보가 금권 선거를 했다면서 투표함에 불을 지르기 위해 동헌까지 갔으나 오히려 정 후보 선거요원들의 역습을 받아 자신이 타고 있던 차가 불태워 지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가 가장 투사적 기질을 보인 때는 1969년 3선 개헌 반대 운동 때였다. 이 무렵 그는 원외였지만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이끄는 청년 조직의 핵심요원으로 당원들과 함께 3선 개헌 반대에 앞장서다가 중앙정보부로 잡혀갔다. 그는 그 곳에서 20여일 동안 심문을 받으면서 발길질과 몽둥이질을 수없이 당했다. 수사관들은 그를 3선 개헌 반대로 사회를 혼란케 해 북괴를 이롭게 한 ‘용공분자’라면서 신민당 청년조직과 지원세력을 밝힐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지 않자 김형욱 정보부장이 직접 심문했다. 김 부장 역시 최 후보가 이끄는 데모를 북한이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면서 호통을 쳤다. 그는 최 후보가 원하면 유학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나중에 8대 총선에서 당선된 최 후보는 전국구로 들어온 김형욱을 국회에서 만났다. 이때 최 후보는 그에게 “내가 중정에서 고문을 받을 때 당신이 제안한대로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면 이처럼 우리가 국회에서 다시 보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비꼬기도 했다.

울산에 포진해 있던 선거 명사들 역시 그의 당선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최 의원을 돕기 위해 서울에서 수협중앙회를 박차고 울산으로 왔던 심완구, 재야에서 신민당 울산지구당 기획실장으로 영입된 김기홍, 3선개헌반대투쟁위 선전부장으로 있다가 선거캠프로 옮겨온 이일성 씨가 선거 때 크게 도왔다.

최 후보가 심씨를 울산으로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최 후보는 울주군 서생면 진하 태생으로 학창 시절 대부분을 부산과 서울 등 외지에서 보냈기 때문에 선거 때만해도 울산 도심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이에 비해 심씨는 울산제일중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울산 중심에 살며 활동했기 때문에 지인들이 많아 이를 활용할 계획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심씨가 최 후보를 돕기 위해 울산으로 온다는 소문이 나자 이장우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이 심씨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는 전화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실장이 고향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왜 그가 갑자기 저녁을 먹자고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선거 때마다 중정이 관여해 내심으로는 이 실장이 또 공작정치를 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걱정을 했습니다. 이 실장이 차를 갖고 와 이문동으로 가자고 해 이문동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 때 이 실장은 ‘자네와 최형우가 함께 선거운동을 한다고 하니 이번 선거에서는 울산에 야당 바람이 크게 불겠다’면서 ‘열심히 최 후보를 도와 당선되도록 하라’는 격려의 말만 해 오히려 제가 이상했습니다.”(심완구)

이일성씨 역시 최 의원을 크게 도왔다. 나중에 경남도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이씨는 당시만 해도 공화당 내에서 이도선 연수원장 다음으로 언변이 좋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말을 잘했다. 그는 이 선거에서 신랄한 언변으로 유세장에 나온 유권자들을 마음대로 웃기고 울리면서 최 후보 당선의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최영근 제일생명 비서실장으로 최 후보를 돕기 위해 울산에 왔던 박임근씨 역시 최 후보를 크게 도왔다. 7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김대중씨의 인기가 높아 8대 총선에서 야당 후보들은 김씨가 자신들의 선거구로 와 찬조연설을 해 줄 것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최형우 후보의 경우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다보니 중앙당은 처음부터 김대중씨가 울산에서 찬조 연설을 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이 때 나선 사람이 박씨다. 박씨는 평소 김대중씨와 최영근씨가 가까운 점을 이용, 김대중씨가 순천 유세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순천으로 가 김씨를 만난 후 울산으로 와 최 후보를 도와 줄 것을 당부해 이를 성사시켰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8대 총선에서 울산에서 출마했던 후보는 공화당의 박원주, 신민당의 최형우, 국민당의 김성탁, 통사당의 박태륜 등 4명이었다. 이중 국민당의 김씨와 통사당의 박씨는 처음부터 당선권에서 멀었던 후보였다. 4대 때부터 단골로 출마했던 김성탁 후보는 이때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7대 총선에서 이후락과 박 대통령이 선거 후 약속한 농림부 장관자리를 주지 않은 앙갚음으로 출마했던 그는 선거 내내 여당의 박원주 후보를 공략하는데 집중했다. 이 선거에서 김 후보가 얻은 표는 동정표를 포함, 무려 1만4000여표나 되었지만 3위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개표 때는 오지않고 가죽 점퍼를 입은 채 울산초등학교에 나와 자신의 한표 한표를 직접 챙겼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전략대로 공화당의 박 후보가 낙선하는 것을 보면서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정치판을 떠났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행운을 잡았던 최 후보는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한 유신으로 그는 물론이고 그를 따랐던 당원들마저 계엄군에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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