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울산읍성(蔚山邑城) 제2편 -힘겨운 울산읍성 만들기

▲ 1436년 울산군과 경상좌병영의 관계도

1416년 8월경부터 쌓기 시작한 조선의 새로운 울산읍성(현재의 병영성 일곽)은 2개월이 겨우 지난 10월에 이르러 성벽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시련을 딛고 다시 쌓아 이듬해인 1417년 1월에 완공의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경주지역에 위치하던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하 경상좌병영)의 군대가 새롭게 쌓은 울산읍성으로 들어와 그들의 성(城)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때문에 당시 울산군(울산군의 관료 등)은 고려 말(1385년)에 쌓았던 옛 읍성(고읍성)에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울산에 경상좌병영과 울산군의 양립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상좌도 방어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경상좌병영은 옛 읍성에 머물고 있는 울산군을 병영성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부단히 시도했지만 울산군은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1417년 1월 읍성 첫 완공
경상좌병영 군대 읍성 점령 
울산군은 고읍성에 머물러

1426년 경상좌병영이 합포로
병영성은 울산읍성 용도로
울산군 행정-군영 겸해 사용

1436년 경상좌병영 다시 옮겨와
울산군은 다시 병영밖으로
성도 없는 동헌 일원에 안착

힘없는 울산군 행정
세조 “유포석보 축성 더 시급”
차일피일 미뤄지다 1477년 완공 

그러나 9년 뒤인 1426년, 울산의 경상좌병영이 당시 합포(현재 창원)에 위치하던 경상우병영에 합치됨으로써 이 체제는 바뀌게 되었다. <세종실록> 34권, 세종8년(1426) 11월12일의 기사에 ‘이조(吏曹)에서 계하기를, 이미 경상좌도 도절제사를 혁파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 첨절제사(僉節制使)는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로 겸임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사는 경상좌병영이 머물던 성(城, 현재의 병영성)을 본래의 울산읍성 용도로 다시 사용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경상좌병영의 군대가 떠난 병영성에 울산군의 행정과 첨절제사의 군영을 겸해서 사용하도록 하고, 그를 통솔하는 수령은 지군사로서 첨절제사를 겸직하도록 하였다는 뜻이다.

▲ 울산염포지도(1471년 제작).

하지만, 10년 뒤인 1436년 12월에 경상좌병영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옮겨 오면서, 울산군과 경상좌병영의 모호한 관계는 재차 발생하였다. 그래서 울산군은 다시 병영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세종18년(1436) 울산군의 치소를 병영의 서쪽 7리 되는 곳으로 옮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에서의 당시 ‘옮긴 울산군의 치소 위치’는 고읍성(옛 읍성) 터가 아니라 지금의 중구 복산동·중앙동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1426~1436년 10년 동안 울산군의 치소(읍치)를 병영성으로 옮김으로써 옛 읍성(고읍성)은 방치되어 무너지고 퇴락하여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옮긴 곳에 대해 특정 장소의 언급 없이 막연히 ‘병영의 서쪽 7리’라 하여 고읍성과 관련된 내용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병영성으로부터 서쪽으로 7리를 측정해 보면 지금의 동헌이 있는 복산동·중앙동 일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울산군은 경상좌병영과의 관계 속에서 몇 회에 걸쳐 읍치(치소)를 옮겼고, 결국 성(城)도 없는 현재의 동헌 일원에 안착하였다.

한 고을에 병영성이 위치하는 것은 침략하는 적(賊)을 적극 방어해 주는 등 여러 장점이 있을 수 있지만 ‘행정적으로 독립하여 사용 할 읍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약화시키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사례로 당시 경상우병영이 위치하였던 창원도 울산처럼 읍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세조실록> 5권, 세조2년(1456) 8월12일 기사에 ‘경상도(慶尙道) 순찰사(巡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창원(昌原)·울산(蔚山)은 연해(沿海)의 큰 고을이어서 성보(城堡)가 없을 수 없다. 두 고을의 성 쌓는 것의 편부(便否)와 다른 변군(邊郡)의 성보(城堡)를 합당히 설치할 곳을 살피어 아뢰라고 하였다’는 기록은 1456년 당시 병영을 둔 울산과 마찬가지로 창원에도 읍성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한편 이 기록은 울산에 읍성을 새로 쌓아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머지않은 시기에 읍성을 쌓아 울산군으로서의 격을 갖출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도 불과 5개월 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세조실록> 6권, 세조3년(1457) 1월29일의 기사에 ‘구치관(具致寬)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울산과 창원은 절제사영(節制使營, 절도사영, 병영)과 가깝고 사변이 있더라도 입보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별도로 읍성(邑城)을 축조(築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상도(慶尙道)의 유포(柳浦)는 방어(防禦)가 가장 긴급(緊急)하니, 여러 고을 사람을 부역(赴役)시켜 이를 축조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세조가 1456년 8월에 울산읍성을 쌓기 위해 그 장소를 찾아보라고 명하였으나 5개월 뒤인 이듬해 1월 울산읍성보다 유포석보(현재 북구 정자일원 위치)를 쌓는 것이 더 급하다는 의견에 찬성하여 결국 울산읍성의 축성이 또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던 것을 알려 준다.

유포석보는 경상좌병영의 일부 군대를 현재의 정자일원 바닷가에 배치한 일종의 작은 병영성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울산읍성은 1417년에 이어 다시 한 번 경상좌병영의 위세에 밀린 셈이 된다.

성(城)을 가진 경상좌병영과 성(城)이 없는 울산군이 지척의 거리를 두고 서로 위치한 모습은 1471년에 제작된 ‘울산염포지도’에 잘 묘사돼 있다. 이 지도는 울산군의 경우 원형의 실선으로 단순 표기한 반면, 경상좌병영(지도에 절도사영으로 표기)은 돌로 성벽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까지 묘사하여 튼튼한 성(城)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상황에도 불구하고, 해상으로 침범하는 외적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던 울산에 읍성을 반드시 쌓아야 한다는 당위성만은 변함이 없었기에 성종7년(1476) 5월 드디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토록 고대하던 열망에 비하여 울산읍성의 축성(築城)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하였다. <성종실록> 78권, 성종8년(1477) 3월3일의 기사에 ‘경상도(慶尙道)의 창원(昌原)·울산(蔚山)과 전라도(全羅道)의 부안(扶安) 세 고을의 성(城)은 본 고을에 살고 있는 백성으로 하여금 쌓게 했는데, 1년에 쌓은 것이 200~300척(尺)에 불과합니다…가까운 고을에서 장정을 보내어 기한을 두고 점차 쌓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1476년 5월에 시작한 울산읍성 축성공사가 10개월이 지나도록 공정의 10%에도 미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보다 규모가 컸던 경상좌병영성을 약 5개월 만에 완성한 것에 비추어보면, 공사의 진척은 너무나도 느린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인근의 여러 고을로부터 공사인력이 적극 투입될 수밖에 없었고, 다시 7개월이 지난 1477년 10월에 그토록 염원하던 울산읍성이 완성되었다. 이는 조선이 개국(開國)되고 8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에 대해 <성종실록> 85권, 성종8년(1477) 10월29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이달에 경상도 울산(蔚山)의 읍성(邑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척(尺)이고 둘레가 3639척(尺)이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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