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솔마루길에서 힐링을…

▲ 솔마루길 입구(선암호수공원쪽).

울산을 대표하는 둘레길 ‘어울길’
태화강둔치~선암호수공원 코스 인기
남산전망대 오르면 시가지 전경 한눈에
숨막힐듯한 신선함 품은 피톤치드와
지천에 쌓인 낙엽은 옛추억 불러와

제주 올레길이 인기를 끌자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둘레길을 조성했다. 우리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길(道)은 단순한 경로로서의 역할 외에 새 임무를 부여받았다. 도보나 자전거 여행을 통해 건강을 지키고 자연과 역사, 문화를 배우는 일이 흔한 일상사가 되었다. 둘레길은 이제 주민의 복지 인프라이자 관광사업장이 된 셈이다.

울산을 대표하는 둘레길은 ‘어울길’로 동구 월봉사에서 남구 선암호수공원까지 연장 75㎞로 조성되어 있다. 모두 7개 코스로 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사랑받고 있는 것이 마지막 코스인 솔마루길이다.

▲ 솔마루 산성.

솔마루길은 태화강둔치에서 선암호수공원까지 소나무가 울창한 야산의 능선 길을 연결하여 꾸민 숲길로 14㎞에 달한다. 이 길에 딸려 있는 18개의 지선 등산로는 범굴길, 새미길, 갈티길, 소똥비알길 등 정겨운 옛 이름을 달고 있다. 예부터 있어왔던 길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선 등산로의 총 길이가 10㎞여서 솔마루길을 24㎞라고 하기도 한다.

크로바아파트 옆을 들머리로 해서 솔마루길 산책에 나섰다. 초입은 제법 가파른 비탈길이다. 좌우로 잡목들이 제 할 일을 마치고 옷을 훌훌 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다. 봄날의 화려한 변신을 위해 견뎌야 할 고통이리라.

▲ 선암호수공원 입구.

2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은월봉에 오르니 남산루가 반겨준다. 누마루에 올라 북쪽을 내려다보니 울산의 기적을 안겨준 태화강 푸른 물굽이와 십리대밭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고려 성종이 행차했던 태화루가 새로 중창된 모습으로 의연히 서 있고, 학과 고래를 형상화한 십리대밭교가 조형미를 자랑한다. 고려 말 울주군수 정포가 읊은 울주8경 중 은월봉의 시구 한 소절이 떠오른다.

▲ 호수공원 산책로 야경.

‘하늘이 가까워 은하수 그림자가 환한데/ 봉우리가 높아 달빛이 숨네’

갑자기 “할머니, 알까기합시다” 하는 소리가 시흥을 깨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혼자서 종종 남산루에 온다는 10살짜리 남자아이다. 얼마나 심심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바둑판에 마주 앉았다. 아이는 규칙을 또박또박 잘도 가르쳐주었다. 먼저 한 판을 이기고 다음은 져 주었다. 서운해 하는 아이를 뒤로 하고 길을 재촉했다.

남산루에서 태화강 쪽으로 200m쯤 내려가면 작은 정자가 있다. 비녀같이 생긴 비내봉(비내는 비녀의 방언)에 있는 정자라고 이름을 비내정이라고 붙였다는데 ‘飛來亭’이라고 새겨진 현판을 달고 있는 연유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비내봉에서 범굴길을 따라 남산전망대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남산은 해발 100m가 조금 넘는 12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동쪽 끝은 은월봉이고 서쪽 끝은 삼호산이다. 이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면 남산루, 남산전망대, 태화강전망대, 고래전망대와 솔마루정 등의 쉼터를 만나게 된다. 태화강과 중구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다.

산행의 즐거움에 커피가 빠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현대대륙2차아파트 근처에서 고래등길을 따라 강변에 있는 태화강전망대에 들렀다. 공업용수 취수탑을 개조한 곳이다. 강물을 내려다보니 물고기들이 하얀 배를 드러내며 묘기를 부리고 청둥오리, 물닭 등이 노니는 모습이 생동감을 자아낸다. 태화강을 생태하천으로 자랑할 만하다.

다시 등산길로 복귀해서 삼호산길을 따라가니 그곳에도 태화강전망대란 쉼터가 있다. 안내 표시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느 한곳의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 등산길은 고래 전망대를 지나 솔마루정으로 이어진다. 솔마루정은 남산정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팔각지붕으로 기둥이 촘촘하여 야무치고 앙증맞다.

삼호산길 끝에서 솔마루하늘길을 건너 울산대공원산길로 들어섰다.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길이 넓고 소나무가 많다. 키 큰 소나무들이 사열해서 반겨주고 겨울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면서 피톤치드를 서로 많이 뿜어내려고 경쟁하는 듯하다. 신선함으로 숨이 막힐 것 같다.

숨을 막는 것은 피톤치드만이 아니다. 땅바닥에 지천으로 쌓인 소나무 낙엽(갈비)이 유년의 추억을 끌어냈다. 방학 때면 날마다 산에 가서 갈퀴로 땔감용 갈비를 긁어왔다. 사람들이 날마다 갈비를 긁어대니 갈비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갈비가 없어서 갑갑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수북한 갈비가 어찌 탐나지 않겠는가. 지금이 그 때라면 갈비를 많이 해가서 아버지 칭찬을 받을 수 있으련만….

추억을 깨고 보니 어느새 대공원 정문과 남문 연결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현충탑 입구, 숲속도서관, 정자와 전망대를 지나고 두왕로를 건너는 산책 육교인 솔마루 다리를 건넜다. 남구 시가지를 품에 안은 신선산에 올랐다. 50년 세월의 간극이 고등학교 때 소풍 와서 사진을 찍었던 바위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바위도 늙은 나를 모른 체하는 것 같다. 이은상의 시가 가슴을 울린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 이선옥

겨울 짧은 해가 벌써 설핏해져서 산 속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 남산루에서 10살짜리 아이와 바둑돌로 신선놀음을 한 탓이려나. 서둘러 선암호수공원으로 내려가니 꼬마 전등불이 불천지를 연출하고 있다. 나무에게는 차마 못할 잔인한 일이지만, 호반의 생나무 울타리에 물을 뿌려 얼린 얼음 꽃은 환상적이다. 추운날 밤인데도 아직 산책객들이 많다.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반증이다.

시장기를 달래며 호수공원의 테마파크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성당, 절, 교회를 찾았다. 세 건물 모두 장난감을 연상할 만큼 앙증맞고 작아서 두 사람정도 들어가서 기도나 예배를 할 정도이지만 신앙심이 어디 규모에 얽매이겠는가.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음식보다 못하고 좋은 음식보다도 걷는 게 더 좋다는 말이다. 이 겨울 춥다고 실내에 웅크리고 있지만 말고 아름다운 솔마루길을 걸으면서 건강도 챙기고 사색에 빠져보면 힐링이 따로 필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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