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양의 건축과 인테리어의 사치를 망라한 남인도지역 마이솔에 있는 마하라자 궁전. 저녁이 되면 일제히 불밝힌 건물조명으로 상상 초월의 판타지쇼가 펼쳐진다.

2002년 북인도를 다녀 온 후, 인도를 향해서는 소변도 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내가 다시 인도 행을 작정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그 첫째는 북인도의 짧은 경험만으로 인도사회와 문화를 지엽적, 편파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둘째는 약 14년 만에 인도사회가 어떻게 변했을까하는 호기심, 세 번째는 북인도에서 보지 못했던 불교건축의 원류를 남인도, 혹은 스리랑카에서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이었다.

14년만에 다시 찾은 인도
마이솔의 초호화 마하라자 궁전
사람·짐승 뒤엉킨 전통시장 데바라자
인도의 극단적 대비를 다시 경험하며
공공건축의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
공공사업의 사회적 의미 되짚어 봐야

인도는 내게 가장 여행하기 어려운 나라 중의 하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거나 기반시설이 열악해서 만이 아니다. 겨우 주먹 하나 간격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곡예운전도, 악을 쓰듯 내지르는 자동차 경적소리도 하루 정도면 익숙해진다. 그러나 모르는 길을 굳이 반대로 가르쳐 주거나, 애써 가격을 흥정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두 배 이상의 바가지를 씌우는 행패를 몇 번 당하고 나면 한시바삐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극단적인 계급차별에 의한 하위계층의 비인간적인 삶과 마주치는 일이다. 이들의 생활환경은 지배자들이 남긴 위대한 유적과 너무도 괴리되어 있다. 타지마할 같은 환상의 걸작들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슬럼가의 아수라장과 극단적 대비를 이루곤 한다. 그것은 건축 유산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과연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멋진 건축인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누구에게 멋진 건축인가를 숙고해야 할 필요가 대두된다.

남인도의 첫 여행지에서 나는 그 극단적 차별의 실제 사례와 만난다. 바로 마이솔에 있는 마하라자 궁전(마이솔 궁전)이다. 마하라자는 19세기 이 지역을 통치했던 군주였다. 영국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식민정부에 협조하는 대가로 이 궁전을 지어주었다. 일본인들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에게 세워준 만주국의 위만황궁과 유사한 배경이다. 지금까지도 그 후손이 이 궁에 거주하며 입장수익을 챙기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1897년 영국인 건축가 Henry Irwin이 설계한 이 건물은 인도-사라센 양식에 유럽풍이 가미된 초호화판 건축이다. 사방은 화려한 장식의 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본관의 전면 마당은 천안문 광장을 방불케하는 스케일로 본관의 파사드(정면 외벽)를 돋보이게 한다. 입구부분에는 고뿌람(탑 모양의 장식문)을 갖춘 힌두사원까지 두었다. 본관건물 또한 웬만한 유럽의 중세왕궁보다 큰 권위적 스케일에다가 사라센 양식의 섬세한 장식까지 갖추었다.

내부는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200루피(약 4000원)의 입장료를 물고도 카메라는 빼앗고 신발마저 벗게 할 정도로 애지중지 할만하다. 그나마 중요한 공간은 공개하지 않고 겨우 중정과 복도정도를 관람하게 한다. 하지만 현란한 색조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덮인 중정만으로도 기가 질린다. 화려한 문양의 모자이크 타일, 온갖 형상으로 조소된 기둥들, 금과 은으로 떡을 친 가구와 문, 순금의 옥좌, 서사적인 회화 등 동서양의 건축과 인테리어의 사치를 망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저녁 8시가 되면 모든 건물의 조명이 일제히 불을 밝힌다. 건물의 실루엣을 따라 촘촘히 설치된 십만 개의 전구가 불꽃이 터지듯 야경을 연출한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궁전을 연출하는 디즈니랜드의 만화적 연출보다 더 화려하고 몽환적이다. 이 궁전의 담장 밖에는 이따금씩 정전으로 암흑세상이 되지만 이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판타지 쇼가 펼쳐지는 것이다.

마하라자 궁전이 지배자의 권위공간이라면 전통시장 데바라자는 서민들의 일상적 공간이다. 시장 입구에는 커다란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광장 바닥에 앉거나 누워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도, 생기도 없다. 등에 업힌 채 잠든 아이의 얼굴 위에는 새카맣게 파리 떼가 달라붙는다.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소, 개, 고양이, 원숭이 등의 온갖 짐승들도 하나같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다. 사람도 동물들도 모두 사회로부터 방임되어 있다. 그들 모두가 쓰레기통을 뒤지지만 입에 넣을 만한 먹거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싸놓은 오물들은 그대로 말라붙어 바닥을 이루다가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간다. 짐승이 사람같이 사는 것인지, 사람이 짐승같이 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마하라자 궁전의 요지경 같은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우리의 공공건축을 생각한다. 소위 시민의 공복들이 일해야 할 관청이 그리도 거창하고 화려할 필요가 있을까? 그 관청의 준공식에서 흔히 듣는 정치인들의 언사를 반추해본다. 얼마나 많은 예산을 따냈고 얼마나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는지를 설파하는 자찬 속에는 공공사업을 자신의 치적으로 돌리려는 봉건군주의 인식이 투영된다. 그 관청에서 민원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예산낭비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이제 그 거창한 공공사업의 목적과 과정에 대해 사회적 의미를 물어야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공공건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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