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7)‘내조의 여왕’ 원영일

▲ 선거 때 마다 남편을 잘 내조해 울산 야당인들 사이에 ‘내조의 여왕’으로 불렸던 원영일 여사. 지난해 10월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연 후 남편 최형우 전 의원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경상일보 자료사진

울산에 연고없지만 득표에 최선다해
임신한채 울주군 오지마을 누비기도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 여사
심완구 의원의 부인 홍길순 여사 
정갑윤 의원의 부인 박외숙 여사 등
검소·모범적인 생활로 내조에 앞장

흔히들 선거의 3요소로 인물, 자금, 조직을 든다. 이에 못잖게 중요한 것이 후보자 부인의 내조다. 해방 후 많은 국회의원들이 울산에서 배출되었고 이들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부인들의 도움이 컸다.

대부분의 울산야당 인사들은 지금까지 최형우 의원의 부인 원영일 여사가 울산에서 가장 내조를 잘했다고 판단, 그녀를 ‘내조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최 의원이 출마했을 때 가장 큰 고민이 여성유권자 관리와 이들을 상대로 득표 활동을 벌이는 일이었다. 여성유권자를 상대로 한 득표활동은 대부분 후보자 부인이 하게 된다.

그러나 원 여사는 울산 태생이 아닐 뿐 아니라 울산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연고가 없었다. 원 여사는 포항 출신으로 포항에서 학업을 마친 후 수녀가 될 생각을 갖고 있다가 최형우 후보의 끈질긴 구혼으로 결혼했다. 이 때문에 선거에 돌입하자 최 후보 운동원들은 공공연히 최 후보가 울산 처녀와 결혼했다면 처가 표를 적지 않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울산에 장가를 들지 않았던 최 후보를 원망했다.

어려움은 원 여사가 더 컸다. 남편 선거를 돕기 위해 막상 서울에서 울산까지 왔지만 주위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원 여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복산동에 있었던 울산성당이었다. 원 여사는 포항성당에서 여성활동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울산성당에서도 자연스럽게 교우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이 때 그가 성당에서 만났던 사람이 이귀만(세례명 루시아)씨였다. 이씨는 당시 시내에서 주류상회를 크게 하고 있던 박규동씨 부인이었다. 이씨는 이 선거에서 원 여사를 크게 도왔을 뿐 아니라 박씨는 나중에 대표적인 울산의 재야인사가 되어 선거 때마다 최 후보를 크게 돕는다. 이 선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앞장서 대거 최 후보를 돕게 되는데 이 이면에는 원 여사의 힘이 컸다.

8대 총선은 울산에서 한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지역구가 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울주군은 12개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교통수단이 요즘처럼 좋지 않다보니 후보는 물론이고 운동원들이 유권자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후보와 운동원들이 일일이 유권자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이때만 해도 농촌지역에서는 최 후보가 잘 알려지지 않아 원 여사가 득표를 위해 호별방문을 해야 할 때가 잦았다. 당시 원 여사는 임신 5개월의 몸이었다. 보통 여자라면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농촌 지역을 한군데도 빼 놓지 않고 다녔다.

원 여사가 이 선거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곳이 두동면이었다. 두동면은 당시만 해도 울산 오지로 자동차가 정기적으로 다니지 않아 범서읍 사무소에서 걸어서 가야했다. 당시 두동면에서 최 후보 선거운동을 도왔던 인물로 김성색씨가 있었다. 그는 당시 오지 마을이었던 범서읍 지지마을에 살았다. 원 여사가 두동 일대에서 밤늦게까지 선거운동을 하다보면 울산까지 올 수 없어 그 집 사랑방에서 혼자 잘 때도 많았다.

경찰 미행 역시 원 여사를 괴롭혔다. 당시만 해도 관권 선거가 판을 쳐 야당 후보 운동원들이 선거운동을 하면 경찰이 뒷조사를 했는데 평소 친화력이 있었던 원 여사는 나중에는 이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8대 총선에서 이처럼 어설프게 선거판에 뛰어들었던 원 여사는 그러나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이후 선거 때마다 선거 전략을 직접 짜고 자금 관리를 하는 등 선거 달인이 되어 최 후보의 일등 참모 역할을 했다.

역대 울산출신 국회의원 부인들 중 원 여사 외에도 내조를 잘한 부인들이 많았다.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 여사와 심완구 의원의 부인 홍길순 여사도 내조를 잘했다.

김영명 여사는 울산 남목 출신으로 공화당 때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동조씨의 막내딸로 미국 웨슬리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해 남다른 정치 감각과 뛰어난 화술을 갖고 있었다. 재벌 며느리로 부자 남편을 두었던 그녀는 요즘말로 하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동구에 주부대학을 만들고 복지회관을 세우는데 앞장서는 등 동구 주민들의 문화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정치가의 부인이면서도 정치성을 띄지 않았고 가진 자면서도 없는 자와 잘 어울렸다. 특히 그녀는 동구 주민들과 격의 없는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았다.

동구 주민들은 지금도 “김영명이 없으면 정몽준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2010년 대선을 앞두고 정 의원이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른 적이 있다. 이 때 국민 여론도 “부인의 내조로 보면 정 의원이 최고의 대통령 감”이라는 말이 떠 돌 정도였다.

김여사는 정 의원이 서울로 갈 때 자신이 선거 때면 늘 사용했던 동구 사무실을 장애자 시설을 갖추어 기부했는데 이 사무실이 지금은 동구 복지의 중심인 ‘참사랑의 집’이 됐다.

심완구 국회의원의 부인 홍길순 여사 역시 심 의원 내조에 평생을 바쳤다. 천주교 신자로 평소 복산동 ‘요셉의 집’을 드나들면서 불우노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했던 홍 여사는 꾸밈없는 성격과 따뜻한 인간애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총무 수석을 지냈던 홍인길씨의 여동생이었던 홍 여사는 심 의원이 1995년 초대 울산민선 시장에 출마했을 때부터 그를 도왔다. 이때만 해도 심 의원은 낙선의원으로 선거 자금이 한 푼도 없어 지역 국회의원들마저 그를 외면해 한나라당 후보공천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 때 심 의원이 공천과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홍 수석을 설득한 것이 홍 여사였다.

선거 때면 그녀는 특별히 나서지 않고 길에서 유권자들을 만날 때마다 “좀 도와 주세요”라는 말만 했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심 의원에게 표를 던졌다.

홍 여사가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하고 인간적이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울산시장 선거 때 홍 여사를 도와 심 의원 선거에 앞장섰던 주부 중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보석이라고는 몸에 걸쳐보지 못한 주부가 있었다. 홍 여사는 심 의원이 시장에 당선된 뒤 홍콩 출장을 갈 때 이 주부에게 줄 보석을 하나 사오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보석에 문외한이었던 심 의원이 선물이라고 홍콩에서 사 온 보석이 홍 여사가 보기에도 저가품이라 이 주부에게 주기가 민망했다.

그런데 이 선물을 전달하는 홍 여사의 모습이 어찌나 지혜로웠던지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날 주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홍 여사는 그 보석을 들고 주부들 앞에서 “완구야! 완구야!”하면서 심 의원의 이름을 부른 뒤 “아무리 당신이 세상물정에 어두워 보석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것을 선물용 보석이라고 사왔느냐”고 말한 후 미안한 기색으로 이 보석을 주부에게 전달해 보석을 받은 주부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살아 있을 때 이처럼 헌신적으로 내조했던 홍 여사는 선거 후 얼마 되지 않아 중병으로 서울로 가 진찰을 받는 일이 잦았다. 그는 서울로 가기위해 울산비행장을 여러 번 드나들었는데 이때도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공항 VIP룸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정갑윤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다선을 허락하지 않았던 울산 중구에서 5선의 위업을 달성한 이면에는 부인 박외숙 여사의 내조가 있다.

울산의 역대 국회의원들 대부분은 남편이 당선되면 서울로 가 함께 서울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박 여사는 정 의원이 5선을 하는 동안 계속 울산에 머물면서 지금까지 중구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녀가 정 의원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 주민여론을 듣는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남구 삼산동의 식당 문을 닫은 것이 2~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녀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정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기 훨씬 전인 1992년부터다. 이때부터 복산급식소에서 불우노인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고 이후에도 남해노인복지센터와 혁신도시에 있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말없이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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