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호 극작가

8세기 후반, 경주에선 염불 소리가 끊이질 않았겠다.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그 마을에 있던 절 피리사엔 괴상한 스님이 있었지. 밤이나 낮이나 염불이 흘러나오니 백성들은 그 소리를 위안삼아 고된 일상을 견딜 수 있었지. 염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낭랑하고 구성진 나무아미타불 소리는 피리사로부터 사방 17만호까지 퍼져나갔지. 스님을 이상히 여겼어도 다들 공경했고 그를 염불 스님(念佛師)이라 불렀어. 스님이 열반한 뒤엔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에 모시고 피리사는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지.

이 당시는 통일신라의 기세가 꺾여 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에 당나라하곤 사이가 좋던 때야. 말갈이 발해를 치고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으로 말갈의 남쪽을 공격했으나 폭설로 중단되기도 했어. 통일신라의 국경은 그때부터 패강(대동강) 이남으로 굳어졌고. 경덕왕은 규범과 의복까지 당나라와 똑같이 해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졌지. 가뭄이 오래되고 겨울에도 장맛비가 내렸어. 백성들의 원성을 무마하려고 세금을 많이 거두니 그 불만을 이기지 못한 상대등 김사인이 사직서를 냈겠다. 김신충을 그 자리에 앉히고 정책을 밀어붙였으나 상대등이 시중과 함께 물러났지. 김만종이 상대등에, 김기가 시중에 임명되니 두 손발이 맞거든. 김기는 모든 관청과 관직 이름을 당나라 식으로 고치고 유교정책을 밀어붙였어.

김기가 죽고 염상이, 2년 후엔 김옹이, 3년 뒤엔 김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고, 경덕왕이 승하하자 여덟 살 난 태자가 혜공왕이 되었어. 만월왕후의 섭정에 신하들의 반란이 이어졌지. 궁중의 기강이 엉망이 되고 백성들의 불안만큼 드높아지던 염불 소리. 피리사에서 들려오던 염불 소리는 모반을 준비하던 김양상과 김경신에겐 되레 마뜩찮게 들렸지.

결국 혜공왕을 시해하고 김양상이 제37대 원성왕이 되었어. 염불 소리가 뚝 끊겼지. 아침저녁 염불하며 살다간 염불 스님. 백성들의 유일한 위안이던 스님의 나무아미타불 소리. 1200년 전 그 염불이 요즘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아. 너도 나무아미타불, 나도 나무아미타불….

장창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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