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美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여파로
수출의존도 높은 한국경제 큰 혼란 예상
경제피해 최소화 위한 외교적 역량 필요해

▲ 신병곤 한국은행 울산본부장

993년 거란의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 고려 조정에 국왕과 신하들이 거란 군영에 찾아와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서희는 거란이 곧바로 개경까지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거란의 침공 목적이 고려 정복보다는 송과의 대치상황에서 고려를 거란 편에 묶어 두려는 데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세 번째 화의 사절을 자청해 소손녕을 만나러 간다. 첫 대면에서 서희는 소손녕이 대국에 대한 예로서 절을 할 것을 요구하자 신하도 아닌데 절을 할 수 없다며 기 싸움 끝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또 거란이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자 서희는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의 후손을 뜻하는 점 등의 논리 정연한 주장을 펼치며 고구려 후계논쟁에서 소손녕을 제압한다. 이어 본 회담에서는 소손녕이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거란과 통교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제기한 데 대해 서희는 고려가 거란과 통교하지 않는 것은 여진족이 압록강 유역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고려와 거란이 통교하기 위해서는 여진족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한다고 설득해 마침내 압록강 유역을 확보하게 된다. 이상은 정세 파악에 대한 혜안과 논리 정연한 언변 그리고 죽음도 불사르는 강단으로 우리 외교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이뤘던 서희의 대거란 협상 장면이다.

갑자기 서희 이야기를 꺼낸 것은 현재 우리 주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다시 한번 외교적 역량 발휘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새해 들어 우리경제는 모처럼 부진의 터널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다시 새로운 암초에 맞닥뜨리는 모습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1월 수출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11.2% 늘어난 403억달러로 나타났다. 수출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인 것은 2013년 1월 이후 4년만이다. 3개월 연속 수출 증가를 기록한 것도 2014년 4월 이후 2년9개월만이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은행이 조사한 1월 제조업 업황 경기실사지수(BSI)도 지난해 12월보다 3P 상승한 75로 1년9개월만에 최고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소식에 찬물을 끼얹는 상황이 발생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장하는 ‘미국우선주의’에 의한 보호무역주의 대두와 금융경제시장의 불안 가능성이다. 선거기간 동안 미국과 미국민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NAFTA(북미자유협정) 재협상과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공약 관철을 위해 다자간 무역협정의 틀을 깨고 양자간 협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일본, 중국, 독일을 환율조작국으로 지목함으로써 향후 세계경제 질서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 산업 보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하겠다는 입장을 노골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제 역학구도, 즉 그동안 형성된 다자간 협상의 결과 등을 근거로 미국의 의도가 그대로 관철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수출의존도가 높은 경제는 어떤 형태로든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야기될 경우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우리 기업들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다 1000억달러에 육박하는 경상수지 흑자규모 등은 언제든지 한미FTA의 재논의를 촉발할 수 있으며 환율조작국 지정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환율변동성을 확대해 수출기업의 불안을 가중할 수 있다. 벌써 외신에서는 트럼프 보호무역주의의 영향으로 한국 원화와 대만 달러화가 최대 위험자산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미국과의 양자간 협상이 미국이 필요로 하는 부분 위주의 족집게식으로 진행될 경우 우리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000년 전 서희가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치밀한 논리와 결연한 의지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돌려세우고 새로운 땅을 개척했듯이 정부와 기업이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 예상되는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한 발 더 나아가 새롭게 형성되는 금융경제환경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병곤 한국은행 울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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