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산을 이고 사는 사람들
12) 울산 큰포수(끝)

▲ 울산의 한 포수가 사냥한 토끼와 꿩을 들고 섰다. 영남알프스학교 제공

갑사 아버지 따라다니다 포수로
평소엔 평범한 농부로 지내다
사냥철에 접어들면 눈매 달라져
영남알프스 표범 사진 보자마자
포수 이름·총·표범 종류 ‘술술’
경상도 호랑이 해방전 자취감춰
일제강점기땐 범 잡아도 압수돼
호피가 여태 남았을리 만무

명포수로 이름 날렸던 울산 큰포수를 만났다. 안간힘으로 짐승을 쫓는 외길 인생을 살아 온 그는 생사해탈을 한 노인네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농부로 지내다가 사냥철에 접어들면 눈매가 부리부리해지는 늙다리 포수였다. 내가 산산골골 발품을 팔아본 바로는 백세장수 어른들의 공통점은 산을 이고 산다는 것이다. 울산 큰포수 역시 홍두깨 봉우리를 안고 살아온 덕인지 백세를 목전에 둔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끔 짱짱해보였다.

“난 갑사 아버지를 따라다니다가 왜정 때 부산에서 수렵허가를 냈어. 허가 내고 어울려 다닌 사람은 네댓 명 정도였네. 시방 살아 있는 사람은 나하고 웅촌 황포수 뿐이야. 울산 대복 김포수, 대한 노포수는 무허가 사냥꾼들이였지. 부산 범일동 시장에서 옷감상회 하던 이포수, 부산 배포수, 부전동 최포수를 잘 알아. 사향노루 잡은 내와 정포수는 사람을 잘 못 쏘아 징역살이 했어.”

▲ 1960년 가지산 부처바위에서 포획된 영남알프스 최후의 표범 ‘가지산표범’ 사진.
 

큰포수의 사냥 무대는 울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전역이었다. 대둔산, 청량산, 문수산, 신불산, 영축산, 가지산, 억산, 운문산, 통도사 오룡산을 뭉개지도록 쏘다녔다. 하루 잡아 하루 먹고 사는 그는 만병통치약을 구하려는 호골(虎骨)꾼들에게 넘겼다.

“그땐 민둥솔(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라 꿩 노루만 있고, 큰 짐승이 없었어. 천성산도 잡목만 있고 발가벗긴 마찬가지야. 멧돼지라도 잡으려면 큰 산에 가야 했어.”

보통 사냥을 나설 때는 서너 명이 어울려 다녔다. 고기 맛이나 볼 요량으로 산짐승을 쫓을 땐 개딱지 움막에서 기거를 했고, 횡재가 될 영물을 쫓을 때는 아예 사람 접촉을 피했다.

“산에 헌신할 줄 아는 마음 씀씀이 없인 범 잡으면 망해. 영험한 범을 잡아 망조가 든 포수가 하나 둘 아니야. 명포수로 이름 날렸던 이포수는 영축산 호랑이 잡다가 쫄딱 망했고, 부전동 최포수는 가지산 범을 잡는 바람에 아들은 병신 되고 며느리는 방안을 빙빙 돌며 ‘내가 범이다’ 미쳐 날뛰더군.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일은 배우지 말아야 돼. 큰 짐승 쫓을 때가 가장 위험 하다는 훈계를 자주 들었었지. 멧돼지 송곳니에 배가 터져 죽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니깐.”

▲ 백두대간에 서식하는 담비가 CCTV에 찍혔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도 어렵게 발견된다. 국립생물자원관 한상훈 박사 제공

삼대 째 짐승을 쫓아온 굴곡진 이야기를 들은 뒤, 준비해간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1960년 석남사 뒷산에서 포획된 영남알프스 마지막표범 사진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포수 앞에는 죽은 표범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고, 몸통에는 엽총 한 자루와 긴 탄띠가 길게 걸쳐져 있었다. 나는 영남알프스에서 마지막으로 표범이 잡혔던 1960년 당시의 상황들이 궁금했다.

“이 양반 알지. 이 양반은 큰 짐승만 잡는 포수야.”

울산 큰포수는 가지산표범을 잡은 포수를 알아보았다.

“부산 부전동에 살던 최포수야. 온산 김상용포수가 이 양반에게 총 구입했지. 이 양반하고 청송에 사냥 간 적 있지. 늘 같이 다닌 함경북도 청진 사람 조포수는 점잖은 편이고 이 양반은 매너가 영 개차반이었어. 같이 잡은 사향노루를 조포수에겐 안 주고 자기 혼자 홀딱했던 양반이지.”

큰포수는 총을 보자 눈빛이 살아났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짐승을 쫓는 포수에겐 총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총은 10번 총이다.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총이야. 총알은 큰짐승 잡는 9개짜리 탄창이구. 사냥총 중에서 꺾어서 두 말 넣는 꺽검정은 입(총구가)이 두 개야. 소련제를 많이 썼지. 노루나 돼지 잡는데 사용해. 구식 단종은 당기고 탄알 넣고 쏘는 단발용이야. 180번 실우는 비비형 공기총은 두 번 쏠 수 있어. 압력을 가하는 거지.”

공기총으로 조준하는 시늉을 하던 큰포수는 이어서 구식 화승총 이야기도 꺼냈다.

“우리 아버지가 구식 화승총을 썼어. 한 발 당기고 한 발 쏘는 화승총 사정거리는 50~60m 밖에 되질 않아. 목표물이 최대한 다가오도록 기다렸다가 오직 한 방만으로 숨통을 끊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 그래서 명포수는 봤다하면 두 번 안 당겨. 구식 화승총을 쓰던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공격하는 거리는 4~5간(間) 정도니 대략 5~7m야. 그때를 노렸다가 근접 사격을 해야 해.”

자신이 쓰던 총을 소개 할 때는 사흘 죽도 못 먹은 맥 빠진 얼굴이 되살아 나는 모습이었다.

“난 12구경 수평쌍대(양총대)를 들고 다녔어. 불을 내뿜는 총맛 죽이지. 수평쌍대는 총구가 두 개라 두 발 쏘고 딱 꺾어 실탄 장전하네. 방아쇠도 두 개야. 길이가 한 발이나 되고 큰 사냥 할 때 쓰는 총이야. 미제는 무겁고, 벨기에 총은 가볍고 실용적이지. 이것저것 다 쏴 봤어.”

이번에는 사진 속에 든 표범 머리통에 있는 눈, 코, 입, 콧수염과 화려한 매화무늬 가죽 털을 명포수답게 분석했다.

“이 놈은 갈범(표범)이야. 삼장법사는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갈범(葛凡)은 호랑이 줄무늬가 아니라, 칡잎과 같이 무늬가 둥글둥글한 형태로 되어 있어 칡범이라고도 부른다.

“갈가지는 호랑이보다 줄무늬가 약하고 덩치도 작지. 여길 봐. 콧수염을 다 뺀 걸로 보면 죽은 놈은 확실해. 험한 산 넘던 소장수들이 맹수 만나지 말고 감기 쫓으려고 호랑이 수염 지니고 다녔거든. 난 갈가지는 봤어도 갈범은 못 봤어. 표범은 귀한 존재였어.”

경상도 지방에서 호랑이가 자취를 감춘 것은 해방 전이었다. 1926년부터 끈질기게 호랑이를 추적했던 신불산 김재한 포수도 표범은 잡아도 호랑이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해 온다. 반면에 호랑이보다 개체수가 월등이 많았던 표범은 한국전쟁 중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주민들의 눈에 종종 띄곤 했다.

“염소 똥과 노루 똥은 비슷하고, 토끼 똥과 뱀똥은 의외로 굵어. 멧돼지 똥은 억새나 지푸라기가 달려 있어 목걸이 같지.”
 

▲ 배성동 소설가

울산 큰포수는 짐승 발자국과 배설물에도 밝았다. 너덜지대나 바위에서 발자국이 사라지면 짐승 배설물을 보고 다시 추적한다고 했다.

“이 양반 입은 윗옷은 미제 장교 잠바네. 보통 군복 물 들인 옷 입지. 한겨울 사냥 나갈 땐 솜이 든 무명 핫바지에 발목 단입 매었지. 하긴 포수도 여러 질이야. 기생방에서 여자 사냥하는 방포수는 비싼 조끼 사냥복으로 멋 부렸고, 입으로 호랑이 잡는 입포수는 당꼬바지에 목이 긴 장화 신고 다니는 꼬라지가 왜놈 순사 같았지.”

조선인 총포금지령이 내려졌던 일제강점기에는 사냥꾼이 범을 잡으면 압수물이 되었다. 담력 좋은 울산의 명포수들이 안간 힘을 쓰며 잡은 범을 주재소에서 갈취해 갔으니 그 호피가 여태 남을 리는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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