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박물관 자료집 번역
‘1933년 울산군향토지’ 출간

▲ 일제강점기 울산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방어진 전경 사진엽서, 울산공립보통학교(울산객사학성관), 울산왜성과 태화강, 태화나루 줄배.

193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울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80여년 전 울산의 환경과 사람들의 삶을 유추하는 그 시대 조사자료집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자료집은 그 시대 울산군내 5개 소학교와 18개 보통학교에 근무했던 일본인 교사들이 울산의 전역을 조사한 향토지를 만들어 울산군에 제출했던 것이다. 15일 출간된 <1933년 울산군향토지>는 울산대곡박물관(관장 신형석)이 일본어로 기록된 그 향토지를 번역한 국영본이다. 번역에는 한삼건 울산대 교수가 참여했다.

내용에 따르면 울산은 당시 이미 관광도시였다. 최고의 명승으로는 울산성지(울산왜성)와 서생성지(서생포왜성)가 있었는데 두 곳을 찾아오는 유람객이 너무 많아서 지방발전의 큰 자산으로 평가됐다. 당시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그들 조상의 옛 전장이라는 이유로 두 곳을 줄지어 찾아왔다. 이에 성지 두 곳은 공원화됐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울산성지보존회가 운영될 정도였다.

근대 및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송두리째 살아진 ‘태화사’의 흔적이 당시만해도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태화사는 태화강변 산기슭에 있었는데, 지금도 터가 있다’고 기술했다.

조선판 가정생활대백과 <규합총서>(1809)에는 ‘전복 중에 으뜸은 울산에서 가져 온 것’이라 했는데, 울산큰애기의 전복쌈이 유명할 수 밖에 없던 이유도 책을 통해 명확히 밝히진다. 울산의 해안선은 말그대로 ‘전복밭’이었다. 강동면(지금의 정자 일원)에서 시작된 전복 채취는 동면(지금의 방어진 일원), 대현, 온산, 서생 바다까지 이어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호랑이도 그 시대에는 울산 전역에서 출몰했다. 호랑이는 지금의 강동부터 시작해 웅촌, 범서, 두동, 두서, 언양, 상북, 상남지역까지 어디서나 출몰해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921년 경주에서 포획된 이후 그 명맥을 확인할 길 없었던 울산 호랑이의 존재가 이번 단행본을 통해 30년대 초반까지 건재했음을 알려준다. 귀한 사향노루는 두동에서 발견됐고, 울산의 정체성과 같다던 학은 청량과 범서에 둥지를 텄다. 큰 풍랑이 불 때마다 장생포에는 고래가 떠내려 오는 일이 아주 잦았다.

일본인 특유의 꼼꼼한 성향은 행정조직에 대한 기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시대의 울산인구는 약 14만명. 그 중 일본인의 숫자는 3400명으로 전체 인구의 2.3%에 달했다.

울산사람들은 1년 중 상하반기 한번씩 어울림 대동의 장을 연출하기도 했다. 정월대보름 이후 달밝은 밤에 큰줄다리기(마두희)를 ‘민중오락’으로 즐겼고, 추석에는 각 지에서 성대한 씨름대회까지 열렸다.

대곡박물관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 중간중간 각주 설명을 달았다. 부록으로 근대 울산지역을 촬영한 흑백사진엽서와 울산지도도 수록했다.

신형석 관장은 “광역시 승격 20주년을 기념해 울산 지역사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요구되고 있다”며 “이번 <울산군향토지> 번역서가 울산 근대사 이해와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