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벚꽃길과 작괘천
(전)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 봄 기운이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작천정 일원은 화려한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계곡의 물소리가 생동감을 전하고, 물오른 가지마다 벚꽃이 만개한다. 사진은 울산관광 전국사진공모전 입상작들. 진복숙씨의 ‘작괘천’

독립운동의 역사 스민 ‘벚꽃길’
왕벚나무 행렬, 만개땐 꽃터널 만들어
울주군, 3월말~4월중순 벚꽃축제 개최
일제강점기 ‘청사대’ 독립운동 본거지
순사들 눈 피하려 일대에 벚나무 심어

옛 시인들이 즐겨찾은 ‘작괘천’
거센 물살에 파인 너럭바위 물 웅덩이
술잔 걸어놓은 모양새로 酌掛川 명명
포은 정몽주 선생이 글 읽고 시 짓던곳
여류시인 이구소의 시·이름도 새겨져

조선 후기의 가객(歌客) 안민영(安玟英)은 어느 이른 봄날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승 박효관의 집에 놀러간다. 늦은 시간까지 노래하며 즐기다가 밤중에 촛불을 들고 매화 핀 모습을 보러나갔다. 하지만 꽃은 보이질 않고 간간이 내리는 눈발만 보였다. 그냥 돌아서려는 그 때,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있어 촛불을 들고 나무 등걸 가까이 가보니 눈 속에 두세 송이 꽃이 피어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매화꽃이었고, 꽃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났다. 눈 속에 핀다해서 ‘설중매’라 하고, 그 감흥을 시로 읊었으니 바로 매화사(梅花詞)이다.

어리고 성긴 매화 너를 믿지 아녔더니/ 눈 기약(期約) 능(能)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 / 촉(燭)잡고 가까이 할 제 암향(暗香)조차 부동(浮動)터라.

바람이 눈을 몰아 산창(山窓)에 부딪히니 / 찬 기운 새어들어 잠든 매화(梅花) 침노(侵擄)한다 / 아무리 얼우려 한들 봄 뜻이야 앗을소냐.

▲ 최정훈씨의 ‘작천정의 봄’

아무리 겨울 시간이 길다 한들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 통도사에 홍매화가 피었단 소식을 듣고, 행여나 하는 마음에 지척에 있는 봉화산 아래 작괘천(酌掛川)을 찾았다. 매화가 피었으니 벚꽃은 어떠하랴싶은 성급한 마음에.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 위치한 이 작괘천에는 맑은 물이 사시사철 마를 날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 물은 간월산과 신불산에서 발원해 봉화산과 백태안산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데 그 물소리가 세상의 잡다한 소리를 덮을 만큼 우렁차고 쾌청하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피해 호젓한 숲길로 접어든다. 작괘천으로 올라가는 이 길은 교동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눈감고도 다닐만한 묵은 길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을 간간이 찾거나 처음 오는 이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은 길이다. 이유인즉 이 길가에는 300여 그루의 왕벚나무가 도열해 있다. 이 나무들은 100년 가까운 세월을 지키고 있는데, 나무에 벚꽃이 만개(滿開)할 즈음이면 꽃이 온통 하늘을 가리며 ‘꽃터널’을 만들어 내니, 그 화려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해금 감탄을 자아내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흰 달빛과 어우러지면서 마치 하얀 가루처럼 분분히 흩날리는 밤의 꽃잎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이곳이 벚꽃 길 가운데도 명품 벚꽃 길임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다보니 3월말에서 4월 중순에 걸쳐 이 길에서는 매년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은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이유를 울주군은 이렇게 전해준다. 일제강점기 이곳 근처 ‘청사대’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모여들던 삼남, 언양, 상북면 인사들이 일제경찰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이 일대에 벚나무를 심은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이 숨은 이야기 앞에서 새삼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한때는 이 벚꽃길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어수선한 시절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2016년 울주군이 나서 대대적인 벚꽃길 조성사업과 함께 주변 정비 사업을 벌인 결과,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길을 비롯한 주변의 모습이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보도블럭을 새롭게 깔아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는가하면 주변 식당과 상점들을 정비해 깔끔하고 정돈된 문화관광지의 모습으로 거듭나 있음을 한 눈에 실감할 수가 있다.

흡족한 마음에 콧노래를 부르며 벚꽃 길을 벗어나서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계곡을 찾아올라간다. 곧이어 노래 한 두곡을 채 흥얼거리기도 전에 한 폭의 진경산수화 같은 자연의 절경이 소나무와 떡갈나무 사이에 감춰져 있다가 바야흐로 무위(無爲)의 그 환한 얼굴을 드러내준다. 바로 작괘천이다.

우리들에게는 흔히 ‘작천정(酌川亭)’으로 익숙해져 있으나, 작천정은 작괘천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누각 건물인 작천정, 그 정자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당도해 눈 아래 펼쳐져있는 계곡의 모습을 보면 ‘작괘천’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수백 평 너럭바위가 긴 세월 거센 물살에 패이고 다듬어져서 마치 술잔과 같이 움푹 움푹 깎여 들어간 물웅덩이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곧 술잔을 반석에 걸어놓은 것과 같이 생겼다 해서 술잔 ‘작(酌)’ 걸 ‘괘(掛)’ 시내 ‘천(川)’을 써 작괘천이라 명명(命名)하였으니, 모양새와 이름이 참으로 걸맞지 아니한가.

감천(坎川)과 남천(南川)의 두 물줄기가 흘러 합류하는 곳에 자연적으로 삼각주가 형성되고, 그 곳이 마치 섬처럼 보여 ‘요도’라고 불린 곳에,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유배를 오게 된다. 지금의 언양 어음 근방에 자리한 요도에서 귀양살이의 한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풍광 좋고 아름다운 이곳 작괘천을 찾은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선생은 작괘천 바위에 앉아 글을 읽고 시를 지었으니, 그 흔적이 아직도 이곳 너럭바위에 선생을 기리는 모은대(慕隱臺)에 오롯이 남아있다. 이와 함께 작괘천 여러 바위에는 여류시인 이구소(李九簫)의 시(詩)를 비롯 여러 가지의 글이 새겨져있다. 또한 사람의 이름자가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진기가 없던 시대에, 이곳을 어렵사리 다녀간 옛 선조들이 기록과 함께 자신의 다녀감을 남기고픈 열망의 발현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요즘 말로하자면 글로써 ‘인증샷’을 남긴 흔적이라고 하면 얼른 이해가 쉬울 듯하다.

▲ 홍중표 자유기고가

작천정 누각에서 작괘천을 굽어보니 술잔을 걸어놓은 듯한 허연 바위 위로 수정 같은 맑은 물이 바위와 부딪히며 내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취해 맑음에 취해 마음의 귀를 기울이니 흘러 내려가던 물소리가 말을 걸어온다. 비록 자연을 좋아해서 자연 속 나들이를 군것질하듯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대인인줄은 알지만, 그래도 일곱 날에 하루 정도만이라도 이런 자연의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삶이 가져다주는 축복이 아니겠느냐고. 그래서 오는 봄날 어느 하루, 물에 비친 산영(山影)과 함께 물을 따라 떠내려 오는 고운 산벚 잎을 보려한다면, 꼭 이곳으로 다시 찾아오시라고. 일찍이 이곳을 찾았던 옛 선인들을 불러 모았던 그 나지막한 소리로 은근히 권해오는 것만 같았다.

그 은근한 권유를 마음에 담은 채 발길을 내딛는다. 그런데 물소리 바람소리 한껏 쾌청한 작괘천의 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위로 이어져 있었다. 방향을 북서쪽으로 잡고 ‘등억온천길’로 접어들면 일명‘도깨비도로’라는 신기하고 재미난 길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다보면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라는 이색적인 건물이 한 채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제 그곳으로 설레는 발걸음을 쉬지 않고 재촉해본다.

홍중표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