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 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 소리를 냅니다

▲ 엄계옥 시인

졸업시즌이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그러나 결혼에는 졸업이 없다. 새로운 시작이란, 이혼이 있을 뿐이다. 부부는 평생의 동지면서 가장 좋은 경쟁자다. 긍정적 경쟁관계라면 그만한 좋은 상대도 없다. 장수 시대에 둘이 따로 또 같이 섬기며 사는 부부 모습이 그려진다. 아내를 무량사라 칭한 시인의 혜안. 부처같이 가족을 껴안고 때론 풍경처럼 맑은 소리도 내고 때론 둔탁한 소리도 내면서 낡아 가는 집 한 채. 흔히들 부엌을 이타의 샘이라고 한다. 가족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공덕 쌓는 일이 밥 짓는 일이니, 그 밥은 곧 성찬(聖餐)이요, 그 몸이 무량사다. 부부애가 무량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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