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지키기 위해 불이익도 감수
자유·정의 보장된 美 위대함 감탄
무사안일 행정 통렬한 반성 절실

▲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트럼프의 반이민행정명령에 맞서는 미국의 모습은 경이롭다. 테러 배후로 의심되는 7개 국민의 입국을 막아 많은 외국인이 미국입국을 금지당하게 되자 곧바로 일어난 법무부 수장의 불복종 사태와 사법부의 행정명령 효력정지판결 뉴스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이민자의 날’과 같은 시위 등으로 미국민의 의지가 표출되고 있지만 필자가 놀랐던 것은 공직자들의 의연한 모습이었다. 반이민행정명령이 미국의 정의에 어긋나므로 대통령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공표했던 법무부 수장의 소신은 ‘즉시경질’이라는 자신의 공직생활 명줄을 끊어놓을지언정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명예였다. 또한 대통령명령이라도 헌법에 위배되면 집행정지로 맞서는 법원판결을 보면서 미국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했다.

미국 찬양론이 아니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신념을 표현하는 용기가 통용되고,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행정부수장인 대통령의 명령을 사법기관이 반대하는 나라의 대단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유와 정의, 평등이라는 미국의 가치가 국민들에게 그저 구호뿐이라면 살아있는 권력에 맞서는 공직자는 없을 것이다. 미국적 가치를 구성원에게 심는 교육이 실재한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수호가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앞선다는 신념이 내재화된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체 그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나라 수준의 현상황, 십수년 째 넘지 못하는 선진국으로의 진입장벽, 소위 ‘넘사벽’을 분석하는 틀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정의, 평등이라는 가치가 발현되고 보장받는 사회이기 때문에 미국의 도전적 기업활동, 각 분야 연구의 깊이와 폭, 폭발적인 창조기업의 등장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확산이 가능하다.

단순히 교육이나 사회보장제도의 수준을 비교해 보면 미국이 타 선진국보다 앞선 지표를 보여주지 못한다. 자동차나 전자기업의 성적표, 각종 복지 지표에서 수위는 독일, 일본 등 유럽 선진국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슬라로 대표되는 전기차 시대의 도래, 3D프린팅의 확산, 신소재 개발과 연구성과의 획득, 민간사업자의 틀로 넓힌 우주개발 영역, 사물인터넷과 첨단영상기술의 결합, 아마존이 시도하는 새로운 물류 시스템, 애플, 구글, 페이스북, 우버는 물론 하이퍼루프까지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최첨단을 이끄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은 특이하지 않은가? 필자가 근무했던 자동차기업의 미국인 디자이너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독특한 제안을 만들곤 했다. 유럽디자인보다 완성도가 낮아 종종 최종안이 되지 못했지만 항상 새로운 디자인 요소와 이슈는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개인차가 있지만 디렉터 지시에 군말 없이 디자인을 수정했던 유럽친구들과 달리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제안을 최종안으로 설득시키려 했던 미국 친구들의 신념과 노력이 곧 ‘창조성’과 ‘프론티어십’이라고 생각한다. 매사에 자유분방하고 불평불만도 많았지만 규칙과 도덕적 가치를 잘 준수했던 미국 친구들의 바탕 또한 자유와 정의, 평등이라는 가치가 내재화된 까닭이 아니었을까? 미국이라는 나라가 끊임없이 도전하고 발전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선점하는 근간이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이 만약 우리나라의 이슈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의 명령에 반대의사를 표하고 사퇴할 수 있었을까? 요즘 국정농단사태와 관련한 조사에서 증인이나 피의자로부터 나온 진술의 대부분이 “위에서 시켜서 저는 그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류임을 감안하면 답이 나온다. 나라와 시대정의에 어긋나더라도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직장이, 밥줄이, 앞날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그저 지시에 따르는 것을 감안해주는 곳이 우리나라다. 필자는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도덕성과 양심의 줄다리기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을 내팽개치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무사안일주의와 몰개성으로는 우리가 결코 발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신념없는 자의식으로는 아무리 창조경제며 4차산업혁명이며 떠들어봐야 소귀에 경읽기다. 공직자이건 기업인이건 회사원이건 연구자이건 학생이건 자신이 살기 위해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흉내만 낼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연성’이라는 멋진 단어로 포장된 자기합리화에 능숙하지 않은가? 사실은 그것이 창의성과 발전, 희망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폐인데도 말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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