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8)박원주

▲ 1971년 8대 총선을 앞두고 박원주 후보가 중구 성남동 유미빌딩 지구당 사무실에서 당원교육을 하고 있다.

경부고속道 건설로 이후락과 첫 인연
언양 농토 도로편입 반대운동 관련
언양면장으로 존경받던 박 후보에
이후락 도움 요청…면민 설득 앞장

8대총선 낙선, 정치에 발 끊어
7대 대선 부정선거로 공화당 고전
이후락 문중·동심회에서도 외면
야당 ‘3기 7암’ 유언비어도 한몫

대부분의 울산시민들은 8대 총선에서 공화당의 박원주 후보가 당선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예상은 공화당도 마찬가지로 선거 막바지 박 후보가 7대 대선의 부정선거로 고전하고 있지만 당선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선거결과 박 후보는 3만7000여 표를 얻어 4만7000여 표를 얻은 최형우 후보에 비해 1만여 표가 뒤져 낙선하고 말았다.

7대 설두하, 9대 김원규 등 다른 공화당 후보에 비해 정치 경험과 사회활동이 많았던 박 후보가 낙선한 가장 큰 요인은 한 달 전 있었던 7대 대선에서 공화당이 울산에서 부정 선거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박 후보는 이 선거에 나서기 전 4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한 경험이 있고 이전에 도의원을 두 번이나 지냈다.

1915년 언양에서 출생했던 박 후보는 언양초등학교와 울산농업보습학교를 거쳐 만주 장춘으로 가 신경공학원을 졸업했다. 만주에서 토목기술을 배워 토목기사가 되었던 그는 이 무렵 강제희씨의 딸 신보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강씨는 평북 창성군 출신으로 3·1운동 때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이곳에서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러시아 국경지역인 흑룡강성 목릉현으로 다시 가 학교와 교회를 건립한 후 민족 계몽운동을 벌였다.

해방 전 울산으로 온 박 후보는 1949년 언양 면장이 되었고 1952년에는 경남도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1957년에는 경남도의회 부의장을 거쳐 설두하씨가 공화당 국회의원이 되자 지구당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71년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가 되었다.

박 후보가 지역민의 존경을 받은 것은 6·25가 터지면서다. 이 때 박 후보는 언양 면장으로 언양 출신 장정들이 전쟁터로 나갈 때 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용돈을 주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은 가정경제가 어려워 전선에 나가는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먹일 형편이 못된 집이 많았다.

박 후보는 언양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부자로 살았던 안효식씨로부터 쌀을 구해 와 면사무소에서 장병들에게 식사대접을 했고 송별회도 열어주었다. 나중에는 쌀이 모자라자 면사무소에 보관해 두었던 정부 양곡으로 장병들에게 밥을 해먹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감사에서 말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식사 대접을 계속해 주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면장 시절에는 언양에서 공공사업을 벌여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민생고 해결에도 앞장섰다. 당시 박 후보가 벌였던 사업이 평리 오룡저수지 축조였다. 평리에 저수지가 건립되기 전 까지만 해도 이곳 사람들은 가뭄이 와도 하늘만 쳐다보아야 하는 천수답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저수지가 건립된 후 평리 논이 대부분 수리안전답이 되어 생산성이 늘어났다. 이런 박 후보의 고마운 뜻을 기념하기 위해 1973년 평리 마을 사람들은 저수지 제방에 ‘오룡저수지 축조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아직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 후보는 언양에서는 잘 알려졌지만 울산 도심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그가 당시 중앙 실세였던 이후락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언양에 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다. 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가 언양을 통과하게 되자 언양 면민들을 포함 상북, 두동, 두서 면민들이 자신들의 농토가 고속도로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해 대대적인 고속도로 건설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때 이후락씨가 농민들을 달랠 수 있는 언양 인사를 찾던 중 지역에서 명망 있었던 박 후보를 알게 되었다. 박 후보는 처음 이씨로부터 지역민 설득을 위한 제안을 받았을 때는 지역민들이 반대하는 일에 앞장 설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민 설득에 앞장섰던 박 후보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이씨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가 8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는 동생 원호씨가 부산지검장으로 있어 선거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 오는 고위 공직자들 대부분은 원호씨의 사회적 지위를 의식해 박 후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이 박 후보의 선거를 적극 도왔다.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238)런 호 조건에도 박 후보는 선거에 나서면서 역풍을 만나게 된다. 그는 60년대 초 집을 언양에서 북정동으로 옮겨 토목사업을 했다. 선거에 나설 무렵 토목사업이 잘 되어 모처럼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 선거에 나설 생각이 없었지만 이씨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출마했다.

이후락씨가 박 후보를 천거한 것은 언양고속도로 사업에서 그가 보여준 성실함 때문이었다. 이씨는 7대 총선에서 설두하씨를 공천했지만 설씨가 상임위 배정 등 의정활동을 놓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이씨 문중은 8대 총선을 앞두고 ‘화랑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후락씨가 직접 출마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씨가 문중의 뜻을 무시하고 박 후보를 내세우자 이들이 박 후보를 외면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공화당 당원들 중심으로 구성된 ‘동심회’ 역시 박 후보 선거를 어렵게 했다. 이 모임에는 김병식 공화당 부위원장과 최상규 울산 MBC 상무, 김정덕 도로공사 언양소장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공화당 당원이었지만 박 후보를 외면했다. 이들이 박 후보를 외면한 것은 박 후보를 이후락씨가 아닌 길재호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 후보가 당선될 경우 다음 선거에서 이후락씨의 울산 공천 영향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박 후보를 돕지 않았다.

나중에는 노재규, 김팔용, 김석근 등 야당 인사들도 이 모임에 가세했다. 이들은 당시 국민당 후보였던 김성탁씨가 선전할 경우 박 후보 표가 김 후보 쪽으로 가 박 후보가 낙선할 것으로 보고 김 후보 선거 운동을 열심히 벌여 결국 박 후보를 낙선시켰다. 실제로 당시 김 후보는 이들의 노력으로 1만3000여 표를 얻었는데 이 표 속에는 박 후보에게 갈 표가 적지 않았다.

야당의 흑색선전 전략 역시 박 후보를 힘들게 했다. 당시만 해도 선거 때면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나도는 등 네거티브 선거전이 치열했다. 이 때 야당이 내어 놓은 마타도어 전법이 ‘3기 7암’이었다. ‘3기 7암’은 김성탁 후보가 이후락 측근들을 비난할 때 처음 사용했다. 김 후보는 7대 총선에서 선거 연설을 통해 울산 유지들 중 이후락씨를 등에 업고 자신의 이익을 챙겨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3명의 기이한 인물과 7명의 암적 존재가 있다면서 이들을 울산사회에서 추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8대 총선에서 야당은 박 후보를 ‘3기 7암’의 한명이라면서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박 후보가 이런 소리를 들었던 것은 8대 총선에서 그의 선거 사무실을 드나들었던 인물들 대부분이 이후락씨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 후보는 선거사무실을 옥교동 유미빌딩 3층에 차렸는데 이동철, 유성렬, 이봉락, 박영출씨 등 이씨와 친분 있는 여당 인물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이를 눈여겨 본 야당 측에서 흑색선전을 쏟아내어 이를 해명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억울하게 당하고 말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당시 박 후보 선거사무장으로 선거를 총괄했던 정창화(82)씨는 “선거 초반만 해도 박 후보가 선거경험과 조직, 자금에서 최 후보를 앞서 선거를 걱정하지 않았지만 선거막판이 되면서 최 후보 측에서 박 후보를 ‘3기 7암’의 한명이라고 소문을 내더니 나중에는 박 후보가 당선되면 이후락씨 보다는 길재호 사무총장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흑색선전을 하는 바람에 도저히 야당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처럼 혼탁한 선거에서 낙선했던 박 후보는 이후 정치에 발을 끊었는데 1983년 울산군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된 후에는 주민 복지를 위한 군정에 몰두하다가 1992년 78세로 영면했다. 가족으로는 장남 문성씨가 삼성그룹 중역에셔 은퇴한 후 타계했고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장녀 선자씨의 아들 신중범이 버지니아 주립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차남으로 언양에서 송강빌딩을 관리하고 있는 형성의 딸 신영이 한국경제기자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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