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울산읍성(蔚山邑城)제3편 -울산읍성의 규모와 성문(城門)

▲ 1930년대 울산 중구 원도심 일원 항공사진, 당시만 하더라도 원도심의 일원의 지형이 비교적 원형(原形)을 유지하고 있었다.

1477년 축성…120년만에 사라져
임진왜란때 붕괴돼 수리했으나
정유재란때 완전히 해체·소실
왜군들 읍성 헐고 울산왜성 쌓아

울산읍성도 ‘4대 성문’ 있었을까
성문 2~3개만 있는 지역도 다수
개수가 적을수록 방어하기 유리
4대 성문 유무로 ‘격’ 논의 불가

1477년 10월 경 현재의 울산 중구 중앙동·복산동 일원에 울산읍성이 조성되었다. <성종실록>의 내용을 보면, 울산읍성은 성종8년(1477)에 완공되었고, 높이 15척(尺), 둘레 3639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은 석축이며, 둘레 3635척, 높이 10척으로 그 안에 우물이 여덟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둘의 자료를 비교해 보면, 단순 수치상에서 읍성의 높이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해 연구를 수행한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그것은 영조척(營造尺)과 포백척(布帛尺, 준수척) 중 어느 것을 적용해서 측정했느냐 하는 것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포백척은 1척(尺, 1자)이 약 47㎝로 영조척의 1척(약 31㎝) 보다 길기 때문에 <성종실록>에 언급된 읍성 높이 15척은 영조척,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읍성 높이 10척은 포백척으로 측정해서 기록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바탕으로 미터(m)법으로 환산해 보면, 15척(尺)은 영조척을 적용하여 약 4.6m의 높이가 되고, 10척(尺)은 포백척의 약 47㎝를 적용하여 4.7m정도가 된다. 따라서 두 문헌의 기록은 적용 척도만 다를 뿐 동일한 약 4.7m 내외의 높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약 4.7m의 성벽 높이는 다른 지역 읍성의 높이와 비교해 보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투 시 적으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성벽 위에 만든 담(墻)의 일종인 여장(女墻)의 높이 1.25m 정도를 합산하면, 총 높이는 6m 정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성곽의 둘레는 몇 척(尺)의 차이만 있을 뿐 위의 두 문헌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리고 성곽은 근세 이전의 그 어떤 것보다 규모가 크고, 길이가 긴 축조물이었기 때문에 그 둘레에 대해서는 영조척보다 긴 포백척으로 측정했을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성곽 관련 학계가 거의 일반적으로 따르는 가설이다. 따라서 이를 적용하여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울산읍성의 둘레는 1.7km 정도라고 할 수 있다.

▲ 해동지도, 울산부지도(1700년대 중반 제작), 정유재란으로 울산읍성이 소실된 뒤의 울산도호부 읍치 모습.

앞서 2회에 걸쳐 언급한 바와 같이 울산읍성은 1417년 현재의 병영성을 울산읍성 용도로 축성했다가 병영성에 넘겨준 일이 있었다. 병영성의 둘레가 2.6km 정도임을 감안하면, 1477년 쌓은 울산읍성의 규모는 1417년에 비해 약 1/3이 줄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규모의 축소는 크게 흠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울산읍성의 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란을 겪은 대부분의 성곽이 그렇듯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울산읍성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전하지 않았다.

먼저, 임진왜란 때 울산읍성은 왜군에 의해 1차적인 피해를 입었다. 지금까지는 임진왜란 때 울산읍성이 어떠한 피해 상황에 있었는지 잘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선조실록> 41권, 선조26년(1593년 8월17일) 기사의 ‘울산(蔚山)·경주(慶州)·밀양(密陽)·대구(大丘)·김해(金海)·진주 등은 모두 폐허(廢墟)가 되어 다만 무너진 성첩(城堞)과 쓰러진 집터만이 있을 뿐이다. 조처하여 수선할 것을 경상좌 · 우도(慶尙左右道)의 감사에게 하유(下諭)하는 것이 합당하겠다하니, 임금이 그리하라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울산읍성이 왜군의 침입으로 상당부분 무너졌었고, 곧이어 수리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울산이 왜군들에 의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은 울산의 의병장 중 한명이었던 제월당(霽月堂) 이경연(李景淵)의 <제월당실기(霽月堂實紀)>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내용 중에는 ‘1592년 5월7일 밤 함월산성에 집결한 의병들이 내려와 울산 병영성의 4문(門) 밖에 매복하고, 나머지가 북을 치고 고함을 치며 병영성 안으로 일시에 진격하니 병영성 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수천 명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군기와 총을 버리고 4문 밖으로 도망가는 것을 매복한 의병 300명이 격살한 것이 수백 급이나 되었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초기에 병영성이 왜군에 의해 점령된 것을 의병들이 급습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정예 군대가 머물렀던 병영성이 이와 같았다면, 울산읍성은 더욱 심각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앞서 언급한 1593년의 무너지고 황폐한 울산읍성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심기일전하여 다시 성을 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해 8월 이후 서둘러 복구하였다.

하지만,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울산이 왜군의 한반도 내 중요한 교두보가 되고 그 일환으로 왜군들이 현재의 학성공원과 그 일원에 울산왜성(도산성, 울산성)을 쌓음으로 인해 울산읍성은 또다시 위기를 맞이하였다. <학성지>, 성곽조에는 ‘선조30년(1597) 왜구(倭寇)가 군성(郡城, 울산읍성)을 깨뜨리고 헐어 돌을 옮겨서 증성(甑城, 울산왜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울산읍성이 아군(我軍)과 적군(敵軍)간의 교전 중에 성문과 성벽이 불에 타거나 무너지는 등 단순 붕괴에 가까웠다면, 정유재란은 울산읍성의 성벽을 가져다 왜성을 쌓음으로써 읍성이 완전히 해체·소실(消失)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울산읍성은 울산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1477년에 쌓은 뒤 1597년 전란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존속기간이 120년에 불과한 울산읍성을 그로부터 소실된 지 420년이나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찾아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역사는 그 어딘가에 실마리를 남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곽의 주요시설을 언급함에 있어 성문(城門)을 가장 먼저, 또 흔히 떠올리는데, 울산읍성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읍성의 동서남북 4방에 모두 1개씩의 성문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러한 사고(思考)의 구도를 분석해 보면, 도성(都城)의 축소판이 곧 지방의 읍성(邑城)이기 때문에 도성에 4대 성문이 있듯이 읍성도 그랬을 것이라는 일반론적인 생각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울산읍성에도 4대 성문이 있었을까?

조선중기 이후 제작된 전국 각 고을의 지도를 분석해 보면, 상당수가 전란을 통해 읍성이 훼손되고 없는 가운데, 남아 있는 사례에서 성문이 2~3개만 있는 것을 다수 살펴볼 수 있다. 경상도 곤양군·경산현·고성현·기장군 등 매우 많은 고을이 3개의 성문만 있었고, 조선중기 이후 울산도호부와 격이 같았던 영해도호부는 남문과 서문 등 2개의 성문만 있었으며 전라도 봉성군과 장흥현도 마찬가지였다. 전라도 고창현과 고부군처럼 심지어 1개의 성문만 둔 경우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초기의 기록이 미약한 울산읍성에 4대 성문이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난해 개운포성에 대해 기술하면서 성문은 동문(東門)과 북문(北門)만 있었고, 성의 서쪽에 위치한 선소(船所, 선착장)가 서문(西門) 또는 남문(南門)의 기능을 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즉 문(門)다운 문은 2개뿐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성문은 필요에 의해서 설치하며, 가급적 그 수(數)가 적은 것이 방어에 유리하다. 하지만 성(城)을 운영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곳에는 어김없이 성문을 둔다. 이와 더불어 성문은 그 수(數)의 많고 적음만으로 격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 예로 충청병영이 있었던 해미읍성은 성문이 3개에 불과하다. 따라서 울산읍성의 4대 성문의 유무가 울산읍성의 격을 대변한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성문의 개수는 잠시 내려두고 울산읍성의 실체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다가가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울산의 그 어떤 성곽보다 도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그 어떤 성곽보다 흔적이 적으며, 그 어떤 성곽보다 이설과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창업 울산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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