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화해속의 만델라 정신처럼
한일관계도 우리의 각오가 중요
국회의사당앞 소녀상 설치 필요

▲ 손영재 법무법인 늘푸른 변호사

나치에 의해 학살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홀로코스트 역사박물관 앞에 설치된 비문에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글이 새겨져 있다. 죄도 없이 600만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학살됐지만 그래도 유대인은 독일을 용서, 그 대신 학살과 숨진 600만 유대인을 잊지않겠다며 박물관을 세웠고 뼈속에 그 아픔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이 사건을 저지른 독일을 용서하고 싶었겠는가?

남아공은 최악의 인종차별정책으로 유명했던 나라다.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는 27년간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고, 그동안 남아공의 흑인들은 백인과의 합의에 의한 성관계조차도 범죄로 처벌당했을 정도로 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정부의 탄압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하지만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생활에도 불구하고, 앞장 서 백인 정부를 용서하고 흑백 화해정책을 펼치며 오늘날 남아공의 기틀을 만들었다. 당시 그가 한 말도 “백인 정부를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월남전에 우리는 미군을 도와 5만명의 병력을 참전시켰지만 미군은 패배했고, 월맹에 의해 오늘날의 통일 베트남이 세워졌다. 1992년 베트남은 개혁 및 개방을 표방하며 실용주의 노선을 선택, 과거 적국이었던 우리와 국교수립과 동시에 경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그 무렵 방한한 베트남 서기장은 우리 기자에게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용서는 하지만 결코 잊지는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에 있는 위령비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한다. “1968년 이른 봄 청룡부대 군인들이 흉포하게도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였다. 하미 마을은 30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는 산산이 흩어지고 태워졌다….” 우리 국군이라고 월남전에서 마냥 잘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베트남 서기장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베트남 국민을 위해 우리를 용서하겠다는 것이고 그대신 아픈 과거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유태인이 독일을 용서하지 않고 독일과 원수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또 넬슨 만델라가 흑인과 백인의 화합·화해 정책을 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남아공은 어떤 상태가 되었을까. 베트남이 한국군의 문제로 국교 단절을 계속하고 우리와 경제 협력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날의 베트남이 있을 수 있었을까?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에 대한 일본의 유감 표명으로 양국 관계의 경색 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과거 주권을 일본에 찬탈당했고, 이로 인해 우리의 누이들이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아픔의 역사는 아물지 못하는 상처이고 되풀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일본은 우리의 안보와 경제를 생각할 때 외면할 수 없는 이웃이다. 베트남이 우리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우리와의 화해를 통해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듯이 우리 또한 일본을 우리의 생존 전략을 위한 협력자로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그런 견지에서 2015년 한일간의 합의를 통해 미흡하지만 일본 정부가 사과를 하고 우리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고 화해정책을 택한 것은 바로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는 정신의 발현이다.

한편 ‘부산 소녀상’을 일본이 어떤 이유로 항의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는 일본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잊지는 않겠다는 다짐의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아픔을 뼈속 깊이 새겨 다시는 우리의 누이로 하여금 그러한 아픔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이어야 하므로 ‘소녀상’은 우리의 뼈와 혼 속에 설치되어야 한다. 또 오늘 날 우리의 정치적 지도자들이 “용서는 하지만 결코 잊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한일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국회의사당 앞에 ‘소녀상’을 설치하면 어떨까 싶다.

손영재 법무법인 늘푸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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