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사 자비의 집 앞에
경칩을 맞은 노인들 하나 둘
해동을 합니다
실팍한 햇볕에 굳었던 근육
자근자근 물이 돌고요
의자가 놓이고 콧수건 같은 보자기
가슴을 에두른 모범생이 되어
가위손 펑키족 청년을 올려다 봅니다
세월의 함몰에
오물오물 회심곡 부스러기 쪼는 입
반짝 피어 선명한 저승꽃
생의 탁본입니다

▲ 엄계옥 시인

노인들이 새봄을 맞아 이발하는 장면을 한 폭의 대형 그림으로 본 시다. 해남사 자비의 집 앞에 펼쳐진 큼지막한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자비의 집에 이발하는 자원봉사자가 왔다. 그의 등장으로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자비 집에 활력이 돈다. 활력은 노인들을 집 밖으로 불러낸다. 그야말로 해동이다. 요란한 머리 모양을 한 청년 봉사자 앞에서 노인들은 하나같이 턱받이를 두른 착한 학생이 된다. 겨울 끝이라 시린 기운이 남아 있지만 햇볕 앞에 무방비로 놓인 노인들 표정이 압권이다. ‘실팍한 햇살에 근육에도 자근자근 물이 돌고’ 입 주변으로 몰려든 ‘세월의 함몰’을 한 장의 그림으로 탁본 중이라니. 대형 소묘 속에 든 풍경이 깨우침을 준다. 저승꽃들이 ‘생의 탁본이라’는 통찰에 절로 머리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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