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하고 빈약한 계약서는 분쟁 초래
전통적 정서나 관행에 눈치보지 말고
상세한 계약 설정과 꼼꼼한 확인을

▲ 황승태 서울고등법원 판사 전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5년 전 해외연수로 미국에서 생활할 때의 일이다. 그쪽 중개인(broker)을 통해 집을 구하고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멀리 금문교가 보이는 근사한 아파트였다. 그런데 임대차계약서의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거의 20장 가까이 됐다. 서명할 곳도 많았고 내용도 무척 상세했다. 아파트 신축 전 어떤 곳이었는지, 지하에 무엇이 묻혀 있고 주변에 무엇이 있으며 그로 인해 생활하는 데 어떤 편의와 지장이 있는지 등 시시콜콜한 내용도 있었다. 거주하면서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손해를 보상하는 책임보험에도 가입해야만 했다. 임대인이 부동산 임대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여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분량과 내용으로만 보자면 거의 기업 인수·합병 정도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부동산 임대차계약서는 분량도 적고 내용도 빈약한 편이다. 대개는 표준계약서 양식에 몇 가지의 특약사항을 추가하는 형태이고 분량도 한 장을 넘지 않는다. 통상적인 차용증도, 어지간한 약정서도 한 장을 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비하할 필요는 없다. 상세한 계약이 반드시 훌륭한 계약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모든 요건과 효과를 망라한 이상적인 완벽한 계약(perfect contract)을 상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없고 모든 정보를 확보할 수 없으며 때론 비합리적인 인간의 한계와 다의적인 언어의 제약은 근본적으로 완벽한 계약을 체결할 수 없게 만든다. 더구나 완벽한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까지 일일이 합의하여 규정한다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들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계약을 추구하다가는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다. 득보다는 실이 클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외에도 불완전한 계약을 체결하는 합리적인 이유는 많다. 당사자의 노력 정도나 기술적 난이도와 같은 막연한 내용들은 그것을 규정한다고 해도 확인하기 어렵다. 계약을 불완전하게 체결해도 법원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바람직하게 해석할 수 있다. 계약 위반에 대해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것은 불완전한 부분을 묵시적으로 대체하는 기능을 한다. 불완전한 계약 내용이 문제되는 경우 다시 협상을 하여 재계약을 할 수도 있다.

그렇긴 해도 다시 우리나라의 계약 문화에 눈길을 돌리면 어딘지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 재판에서는 허술하고 빈약한 계약 내용 때문에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거액의 현금 거래를 하면서도 계약서나 차용증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세하게 계약을 체결했으면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사안도 많고,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증거가 없어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계약서 작성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계약 문화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라고 해서 불완전한 계약을 체결할 이유가 더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할 특별한 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흔히 서면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점, 정(情)을 우선하는 사회 분위기 등이 간단한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계약서를 생략하는 이유로 거론되기는 한다. 하지만 실제 재판에서 수많은 분쟁의 원인을 목격한 입장에서 한마디 하고 싶다. 그것이 고유의 전통과 관행이라고 해도 이제는 따를 이유가 없다고. 계약서를 잘 작성하고 구비해 두는 것은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예방에도 위력을 발휘한다고.

귀띔 한 가지 더. 솔직하게 고백하면, 미국에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서의 내용을 제대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입주에 급급한 나머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짚어주는 곳마다 서명을 하였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숨죽이며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했고 세세한 금지 사항에 경악을 하고 말았다. 그 후로 몸조심(?)하며 산 것은 물론이다. 상세한 계약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계약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황승태 서울고등법원 판사 전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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