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보명 성안중학교 교사

몇 해 전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알퐁스 도데의 소설 <세갱 영감과 염소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친구 그랭고와르가 불안정한 시인의 삶이 아니라 신문 기자로서의 안정된 삶을 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바로 세갱 영감과 염소 블랑케트이다. 세갱 영감은 염소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지만 어린 염소는 늘 산 위를 궁금해 한다. 세갱 영감의 보살핌과 안정된 생활보다 위험하더라도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염소는 결국 우리를 탈출하여 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자유에 한껏 취한 염소 앞에 나타난 늑대로 인해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죽음으로 치러야만 했다.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아이들과 과연 누구의 선택이 타당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양측의 의견이 팽팽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아이들은 현실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자유만을 원한 염소가 무모하다고 말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안타깝긴 하지만 스스로 원한 삶을 살았기에 그 염소는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 수업의 끝에 나는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염소의 용기에는 개인적으로 공감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수업을 끝냈다. 그러나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어린 염소를 바라볼 때와 꼭 같지만은 않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한다. 그 단어에 함의된 긍정적 의미에 걸맞게 우리는 모두 아이들이 자유롭기를 바란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자유를 의심어린 눈길로 바라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으면 교실이 엉망이 되지는 않을까, 지나친 자유가 자칫 무질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 때문에 자유는 제한되기 일쑤다.

아이들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지, 또 자유로움 속에서도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교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분명하게 결정하지 못했다.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울타리를 만들어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고민스러운 문제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이 문제에 대해서 아이들과도 깊이 있는 토론을 나눠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본다. 교실 속에서의 자유와 그 한계에 대해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분명 무조건적인 허용은 옳지 않지만 대화를 통해서 나의 울타리를 조정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염소를 사랑했지만 그를 가두려고만 했던 세갱 영감의 좁은 울타리가 아니라 염소와 함께 꽃이 지천에 핀 산 속을 함께 누빌 수 있는 조금 더 큰 울타리가 블랑케트에게는 필요했을지 모른다. 물론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있을 테지만 말이다.

이보명 성안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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