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0)오무근과 신해음사

▲ 작괘천에 있는 송년 오무근 석각. 8대 총선에서 최형우씨와 공천경쟁을 벌였던 오민근씨의 형이었던 송년은 일제강점기 구소와 함께 우리나라 최대 문단 신해음사에서 활동하는 등 울산문단의 선구자였지만 그에 대한 행적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우리문단 대표한 ‘신해음사’
송년, 신해음사로 등단 구소와 활동
김윤식·장지연·한용운·이해조 등
당대의 명망가들과 함께 문학창작

사회활동 우수…사생활은 불량
민립대학·야학 등 계몽활동도 일조
부인과 자식 있었지만 구소와 동거
재산 많았지만 탕진하고 일찍 타계

울산문인 중앙문단서 활동 주목
지역문인 재조명, 타지역서 잇따라
이상숙 시비 건립장소 문제로 방치
現울산문단의 소극적 자세 아쉬워

정치 초년병인 최형우 의원이 8대 총선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예비 선거인 공천싸움에서 김재호 박사와 차재훈씨가 포기해 대신 언양 출신 오민근씨와 붙어 승리했기 때문이다.

오민근씨의 활동에 대해서는 ‘울산 야당인물’을 다룰 때 상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오씨의 형 송년(松年) 오무근(吳武根)씨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 이 장에서 정치와 무관한 송년의 행적을 다루는 것은 울산문단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해방 전후 언양에서는 신고송, 정인섭, 오영수씨 외에도 한시작가로 <봉선화>를 출간한 구소 이호경 등 걸출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송년은 구소의 첫 남편이다. 송년의 행적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활동한 시기가 다른 작가들 보다 앞섰고 또 구소가 송년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소는 추전 김홍조에게 처음으로 시집 가 추전이 타계한 후 거창 부자 정태균씨와 재혼한 후 삶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구소는 추전과 결혼하기 전 송년과 문학 활동을 하는 동안 동거했다.

둘은 당시 신해음사(辛亥●社)에서 함께 문학 활동을 했다. 신해음사는 경술국치 다음해인 1911년 전국 문인들의 문학 활동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초기 신해음사를 통해 문학 활동을 한 인물들 중에는 김윤식, 장지연, 한용운, 이해조, 유길준, 김규진 등 당대의 명망가들이 포함되어 이 단체가 우리문단을 대표한 문학단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년이 당시 신해음사를 통해 등단했고 이후 이들과 함께 문학 활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울산의 자랑거리다.

송년은 1884년 오기영씨와 김성미씨 장남으로 언양에서 태어났다. 기영씨는 언양 출신 국회의원 오위영씨와 4촌간이다. 기영씨는 도근, 민근 등 아들 둘과 외동딸 필을 두었다.

기영씨는 언양에서 약재상을 경영해 돈을 많이 벌어 이 재산을 대부분 송년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송년이 문학 활동을 하면서 이 재산을 모두 탕진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고생이 많았다. 송년은 젊은 시절 왕실 업무를 다루었던 궁내부주사 벼슬도 가졌다. 송년 친인척들 중에는 참판을 비롯해 벼슬한 사람이 많은데 당시만 해도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실제로 친인척 들 중 한양에서 살았던 사람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 역시 돈을 주고 벼슬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자주 작괘천을 찾아 풍류를 즐겼던 송년은 작천정 앞 바위에 그의 이름도 크게 새겨 놓았다. 지금도 정자 앞 큰 바위에는 오병선, 김좌성 등 당대의 세력가들과 함께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송년은 부인을 얻고 심지어 자식을 둔 후에도 구소와 살림을 차리는 등 문란한 생활을 했다. 송년의 부인 정기출씨는 송년보다 2살 많았다. 경주 출신인 부인은 친정이 잘 살아 시집올 때 재산도 제법 가져왔다.

송년은 정씨와 살면서 아들 종환 외에도 득, 종, 미종, 미봉 등 4명의 딸을 두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송년이 재산을 모두 날리고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 어렵게 살았다. 송년이 영면한 후 정씨는 자식들을 데리고 시동생 민근씨 집에서 살기도 했다. 이 때 민근씨는 언양면사무소 앞에 대서소를 운영해 돈을 많이 벌었다.

구소가 작품집 <봉선화>에서 추전을 사랑하는 시를 많이 남겼지만 송년과 신해음사에 대해서는 한 줄도 없는 것은 송년과 이처럼 부끄러운 관계를 알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송년은 가정적으로 문란했지만 계몽활동과 문학 활동은 열심히 했다. 1923년 7월26일 조선일보는 당시 언양에서 야학졸업식이 있었는데 이 행사에 송년이 지방유지 일원으로 참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에 앞서 같은해 3월 동아와 조선일보는 민립대학에 관한 보도를 하면서 당시 울산 유지였던 김좌성, 김홍수, 이재락, 박병호와 함께 송년을 발기인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

송년과 구소의 문학생활이 밝혀진 것은 고려대 박영명 교수를 통해서다. 박 교수는 해방 전 후 우리나라 기생들의 삶에 대한 연구를 해 구소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박 교수는 송년과 구소가 부부로 신해음사가 창간될 때부터 투고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 교수는 또 송년과 구소의 글을 볼 때 그들이 단순히 취미 생활로 글을 쓴 것이 아니고 작품에 대한 열정이 남달리 뜨거웠던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논문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것이 울산 문단의 현주소다. 송년과 구소가 당시 이미 중앙문단에서 활동했다는 자체가 울산 문단사로 보면 중요한 일이다. 박 교수의 논문을 보면 송년과 구소가 중앙문단에 등단한 울산 최초의 문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연구가 울산 문단에서는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울산출신 작가들의 삶이 외지에서 먼저 연구 발표되는 일이 잦다. 언양 출신의 신고송은 월북 전 울산에서 문학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신씨의 전집 5권이 오래 전 경남대학에서 출간되었다. 얼마 전에는 오영수, 조순규 등 울산 출신 문인의 연구집이 역시 경남대학의 박태일 교수가 발간한 <경남 부산지역 문학연구>에 실렸다는 소식도 있었다. 울산에도 대학이 있고 또 국문학을 하고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친 사람도 있다.

지난 주 이상숙씨의 딸 국희씨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부친의 시비 건립과 관련 울산 문인들의 자세에 대해 불평 아닌 불평을 털어 놓았다. 이씨는 해방 후 김태근, 정지상씨와 함께 울산문단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는 해방 후 울산에 문화공간이 부족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자신이 운영했던 해동여관을 다방으로 개조해 이곳에서 시화전과 음악회를 열었고 또 유치환, 김동리, 이영도 씨 등 외지에서 문인들이 울산에 오면 그들을 대접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이씨가 타계한 후 이런 그의 행적이 지면을 통해 알려지자 서울에 살고 있던 그의 딸 국희씨가 울산으로 와 옛날 부친과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울산 문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유족들이 돈을 내어 이상숙씨 시비를 울산에 건립키로 협의가 되었다. 지난 10월에는 유족들이 많은 돈을 들여 시비를 울산에서 제작 완공했다. 그러나 이 시비는 지금까지도 건립 장소가 문제가 돼 세워지지 못하고 언양 석재장에 방치되어 있다.

울산시민들은 울산이 우리나라 제일의 공업도시이고 시민 개인 소득이 전국에서도 제일 높다는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일에 임하는 울산 문단의 자세를 보면 아직 우리가 지향하는 일류 문화도시 울산은 먼 것 같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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