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도시 울산을 말하다]-(33)울산읍성(蔚山邑城)제5편 -4대 성문(城門)은 어디에 있었을까?

▲ <학성각면산천도로총도>와 4리문의 위치(1800년대 후반 제작).

오횡묵의 ‘총쇄록’에
울산읍성의 서문자리 언급
남문·서문 자리에 이문 조성
동문·북문 자리도 추정 가능
능선부 따라 성벽 조성 가능성
’자 형태로 4대성문 위치 가늠

앞서 울산읍성 남문(南門)의 위치(추정)에 대해 울산읍성이 소실되고 난 뒤 울산도호부의 남쪽 이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강해루(江海樓)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위치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성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울산읍성에 북문(北門)을 두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울산읍성에 동문(東門)과 서문(西門)도 존재하고 있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를 추적하기 위해 <울산부선생안(蔚山府先生案)>의 ‘울산도호부사 이만유(李萬維)가 1727년 4리문(四里門)을 조성하고 그 중에 남문(南門)은 돌을 쌓고(石築) 문루 3칸을 지었다’는 기록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내용과 그가 읊은 강해루 시(詩)를 종합해 보면, 울산도호부사 이만유가 조성한 고을 관아 주변의 4리문 중에 남이문(南里門)은 울산읍성 남문의 위치를 찾아 그 곳에 강해루라는 이름으로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북이문(北里門), 동이문(東里門), 서이문(西里門)도 울산읍성의 북문(北門), 동문(東門), 서문(西門)의 원래 위치와 각각 같은 곳에 조성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 현재 항공사진에 표기한 울산읍성 내부 주요 가로와 4대성문의 추정 위치.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를 오횡묵(吳宖默)의 <총쇄록(叢瑣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892년 음력 2월 말, 오횡묵은 전운사(轉運使)로 역임한 지인으로부터 하납(下納, 왜관이 필요로 하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동래부에 내는 세금)에 대해 울산이 미온적이므로 이를 독려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울산을 방문하였다.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3월7일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태화강을 건너 태화루 옛터로부터 산을 따라가니 강정촌(강정마을·현재 성남동 성남플라자 북쪽 일원)이 있고, 울산 고을의 집들이 이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데, 1리 정도 돌아 올라가니 성터(城址)가 있고, 서문자리(西門墟)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물어보니 임란 때 왜병이 훼손하여 옮겨 증성(甑城·울산왜성)을 쌓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성(城·울산읍성)을 폐지하였다고 한다’

▲ <영남읍지, 울산지도>와 4리문의 위치(1871년 제작).

이를 보면, 1892년 당시 강정마을과 울산 고을(邑·읍치·동헌을 포함한 관아 일곽)과의 사이에 옛 읍성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그 곳에 서문(西門)자리라고 불리는 지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횡묵이 태화루 옛터(현재 태화강변의 태화루 자리)로부터 동헌으로 접근하는 경로(經路)이다. 오횡묵은 전운사(轉運使)에게 위임 받아 하납(下納)을 독려하기 위해 공무를 띠고 울산을 방문했다. 따라서 울산 동헌 일곽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이문(里門)을 지나야하며, 태화루로부터 고을의 서쪽으로 들어왔으니 서이문(西里門)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오횡묵이 옛 읍성의 성벽에 대해서는 흔적(址)이라 하고, 서문에 대해서는 자리(墟)라고 달리 표현한 것은 1892년 당시 성벽은 일부라도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던 반면, 서문은 서이문이 조성됨으로써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내용은 읍성의 서문자리에 서이문(西里門)이 있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시사한다.

조선시대 많은 관료와 문인들이 태화루로부터 울산동헌을 들릴 때, 이 경로를 이용했음은 여러 고문헌에서도 확인된다. 그 중 하나로 조선후기 경북 의성 출신 문인이었던 임필대(任必大, 1709~1771)의 <강와집(剛窩集)> 3권에는 그가 경주와 울산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글인 <유동도록(遊東都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태화루로부터 강정마을과 연지(蓮池) 사이를 지나 동헌과 객사 앞으로 향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총쇄록>과 <강와집>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서이문은 현재의 양사초등학교 남서쪽 외곽 구릉부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울산도호부 관아 일곽의 남이문(강해루)과 서이문은 울산읍성의 남문과 서문의 위치와 각각 일치함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울산읍성의 북문(北門)과 동문(東門) 또한 북이문(北里門), 동이문(東里門)과 그 위치가 각각 일치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도 한다. 이를 보면, 조선후기 울산도호부의 4리문(四里門)의 고찰을 통해 조선전기 울산읍성의 4대 성문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후기 울산도호부의 4리문(四里門) 중 그 위치가 가장 분명한 남이문(강해루)을 기준으로 할 때, 나머지 이문(里門)은 상대적으로 그 위치와 이름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읍성 일곽을 묘사한 고지도(古地圖)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는 성문(城門)과 성문사이를 연결한 성벽의 위치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남문이 위치하는 곳이 방위 또는 좌향(坐向)에 근거하여 정확한 남쪽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를 들어 조선 도성(都城)의 남문인 숭례문(崇禮門)은 남(南)에서 서(西)로 한참 치우친 남서쪽에 위치하여 서문인 돈의문(敦義門)과 매우 가깝다. 이처럼 성문은 남문이 비록 정확한 남쪽에 위치하지 않더라도 그 이름이 부여되고 나면, 그 서쪽 가장 가까운 성문은 서문, 동쪽에 가장 가까운 성문은 동문, 서문과 동문 사이는 북문으로 명명된다. 이는 성문의 이름이 그 상호간의 관계에 의해 설정되며, 명확한 방위에 제한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울산읍성의 경우도 서문이 서쪽이 아닌 남서쪽 방향에 위치하지만, 서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조선후기 울산도호부 읍치(邑治, 관아 일곽)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길을 명확히 표현한 1871년의 <영남읍지, 울산지도>를 살펴보면, 북문과 동문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읍성이 없는 울산도호부 읍치의 범위가 2줄의 굵은 실선으로 표현되어있고(성곽이 있는 병영성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여장이 표현되어 있음), ①번이 남이문(강해루), ②번이 서이문에 해당한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③은 북이문, ④번은 동이문의 위치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북이문이 서이문과 매우 가깝고, 동헌을 기준으로 북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북이문은 서쪽에 위치하지만, 서문에 비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이문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울산 읍치 주변의 도로를 명확히 표현한 1800년대 말의 <학성각면산천도로총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2개의 지도 모두는 동헌 일곽에서 북이문을 나간 뒤 북쪽으로 울산향교에 접근하도록 길(路)이 표현 되어 있다. 즉 동헌 일곽으로부터 울산향교를 갈 때 향교의 남쪽으로 접근하려면, 동헌의 서쪽으로 나가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북이문이 동헌의 북쪽에 위치하였다면, 동헌에서 향교에 이르는 길은 동헌의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울산의 여러 고지도에서는 그런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울산읍성의 북문은 동헌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울산읍성의 성문(城門), 즉 이문(里門)의 보다 명확한 위치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성곽이 놓이는 곳의 지형적 특성과 그 내부에 조성된 주요 가로(街路)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곽 내부에 조성된 주요 가로가 성벽 바깥으로 뻗어 나갈 때 성벽과 만나는 지점에 성문을 설치하기 때문이다. 울산읍성의 성벽은 골짜기나 완만한 경사지가 아닌 능선부를 따라가며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음으로 울산도호부 읍치 내부에 조성된 가로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 <학성각면산천도로총도>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지적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은 한자의 ‘기(丌)’자와 유사하다. 동헌과 객사 앞을 지나는 ‘일(一)’자형 가로에 남쪽 및 서남쪽으로 뻗은 길이 붙어 있는 모습이다. 이를 종합하여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지형과 가로를 현재의 중앙동 일원에 대입해 보면, 울산읍성의 4대 성문은 항공사진에 제시한 바와 같이 ①남문, ②서문, ③북문, ④동문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추정될 수 있다. 이로부터 각 성문과 성문 사이의 구릉을 따라 선(線)을 이으면 조선초기의 울산읍성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