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3)9대 총선

▲ 김인갑씨는 울산 야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9대 총선에서 최형우 의원의 출마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최 의원의 거절로 이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9대 총선에 출마한 김재호 박사(맨 앞줄 왼편)와 함께 선거연설을 듣고 있는 김인갑(맨 앞줄 왼편에서 3번째)씨.

유신헌법으로 실시된 첫 총선
유신체제에 반감 가진 울산시민
지역 야권서 미는 김재호 박사 대신
투사적 기질 가진 최형우 후보 선택
중선거구제로 1선거구에 2명 선출
이후락의 마지막 대리후보였던
김원규 후보는 쉽게 당선 ‘대조’

유신쿠데타 4개월 후 유신헌법에 의해 실시된 1973년 제9대 총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8대 소선거구제와 달리 9대부터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해 1개 선거구에서 2명을 뽑게 되었다. 또 전체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로 채워 국회를 완전히 ‘박정희 대통령의 시녀’ ‘들러리 국회’로 만들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국회의원 하면 연상되었던 금배지 외에도 2등은 은배지, 유정회 의원은 3위의 동배지가 되어 국회위상을 완전히 떨어뜨렸다.

이때도 법상으로는 국무총리와 대법원장에 대한 임명동의권과 국무위원 해임권을 국회가 갖고 있었지만 이것은 형식에 불과했고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벗어난 국회는 있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렸지만 유정회 의원은 임기를 3년으로 해 이들이 재임되기 위해서는 박 정권에 과잉 충성을 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선거구도 대폭 개편했다. 울산만 해도 8대까지는 울산과 울주를 묶어 1명을 뽑았지만 9대부터는 동래군까지 포함, 중선거구 단기명 투표제로 2명을 선출했다.

9대 울산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그동안 야당 대부로 울산시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던 김재호 박사의 낙선이었다. 선거후유증으로 울산의 야당이 김 박사 계와 최 의원 편으로 나누어진 것도 특징이었다. 이런 후유증은 총선이 끝난 뒤에도 남아 선거후 두 패로 나누어 계속 싸우다가 1987년 6·10항쟁 때가 되어서야 전두환 정권을 쫓아내기 위해 서로 손을 잡았다.

이 선거에서 울산에서는 공화당의 김원규, 신민당의 최형우, 무소속 김재호 박사 등 3명이 출마했다. 이중 김씨와 최씨가 당선되고 김 박사가 낙선했다.

8대 때만 해도 주위 사람들이 출마를 여러 번 권고했지만 거절했던 김 박사가 9대에 갑자기 출마한 것은 유신체제를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9대 총선에서 신민당 공천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무소속으로 나선 것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실제로 9대 총선 전 정해영 의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유진산 당수까지도 김 박사가 신민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거절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시 선거제도는 한 지역구에서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때문에 제1야당의 공천은 당선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김 박사가 주위에서 이처럼 신민당 공천을 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한 것은 김대중이 없는 신민당을 선명 야당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당 활동을 하는 동안 김대중·최영근과 친했던 김 박사는 철저한 민주당 신파였다. 그러나 신파를 대표하는 김대중은 유신 때 일본에 있었는데 이후 국내에 들어오지 못해 9대 총선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조직·자금·인물에서 최 후보에 뒤지지 않았던 김 박사가 떨어진 것은 그의 정치 컬러가 당시 정치상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울산시민들은 박 대통령이 일으킨 유신쿠데타를 싫어해 국회가 원내 투쟁을 통해 유신헌법을 바꿔줄 것을 요망했다.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온건한 성격의 김 박사보다 야당의 투쟁 경력이 있는 최 후보가 낫다는 생각을 했다.

9대 총선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울산야당 인사들은 김 박사가 출마했기 때문에 최 후보의 등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김 박사와 함께 야당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인갑씨가 야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최씨를 불러 사퇴를 종용했으나 최 후보는 이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김인갑씨의 아들로 나중에 울산시의회 의장을 지냈던 김성렬씨의 얘기다.

“어느날 저녁 부친께서 최형우 선배를 갑자기 부르더니 ‘이번 선거에는 지금까지 울산에서 야당인사들을 돕느라고 고생을 많이 한 김 박사가 출마하니 자네는 다음번에 출마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까지도 아버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묵묵히 아버님 얘기를 듣고 있던 최 선배가 갑자기 일어나 바지를 홀랑 벗어 엉덩이를 아버님께 보이면서 ‘제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서 이렇게 멍이 들도록 맞았는데 어떻게 선생님이 저에게 선거에 나서지 말라고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라며 울면서 항변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이후 최 후보는 선거에 나섰지만 우군이 없어 외로운 선거를 치렀다. 8대 총선에서 그를 도왔던 심완구, 이일성, 임종석, 정계석 등 명장들은 대부분 김 박사팀에 합류했다. 그를 도왔던 인물로는 박대해, 박정태, 전규열, 이영채 뿐이었다. 이러다보니 최 후보는 체계적인 선거전략도 세울 수 없었다.

실제로 이 선거에서 최 후보의 부인 원영일 여사는 김 박사쪽으로 간 야당 인사들을 최 후보 쪽으로 데려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들이 거절해 똑똑한 선거 참모 한명 없이 외로운 선거를 치러야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최 후보가 택한 선거 전략이 ‘낙루법’이었다. 최 후보는 유세장에서 연설을 할 때마다 자신은 자금도 조직도 없고 심지어 동지마저 등을 돌렸다면서 눈물로 호소했다. 최 후보는 유신으로 구속되어 있는 동지들을 구출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면서 구속된 동지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당선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그가 유세를 할 때까지만 해도 유신으로 구속된 울산 야당 인사들 중 아직 석방되지 못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최 의원은 자신처럼 투사적 기질을 가진 후보가 당선되어야 지금도 옥중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지를 석방시킬 수 있다고 눈물 어린 호소를 해 상당한 표를 모았다. 이와 함께 그는 유신 때 자신이 당했던 고문과 심지어 부인 원영일 여사의 고문사실까지 폭로하면서 유신정권을 비방해 동정표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최 후보는 당선 후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동지들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을 펴지 않아 그때까지 최 후보가 갖고 있던 ‘의리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졌다. 유신으로 가장 늦게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한 김기홍씨의 증언이다.

“제가 유신으로 구속될 때만 해도 겨울이 되어 솜바지를 입고 옥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출감할 때는 봄이 되었지만 여름옷이 없어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여의도로 최 의원을 만나러 갔습니다. 나를 본 그는 9대 총선에서 울산야당 인사들이 대부분 김 박사 편을 드는 바람에 자신이 선거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최 의원에게 어떻게 하든 유신 때 구속된 동지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울산 삐라사건’의 진실을 국회에서 밝혀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삐라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 섭섭합니다.”

최 의원이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데 반해 이후락씨의 마지막 대리 후보였던 김원규씨는 뜻하지 않게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씨와 같은 학성 이씨 집안에 장가를 든 후 울산군청 양정계에서 일했던 김씨는 9대 총선 무렵 흥농주식회사를 차려 놓고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가 일본대사관 직원으로부터 9대 총선에 출마하라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일본에 있을 때였다. 당시 대원어업주식회사 대표였던 김씨는 어업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 중이었는데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그를 찾는다고 해 대사관으로 갔더니 9대 총선에 출마하라는 이후락 중정부장의 전갈이 와 있었다.

그는 어업문제에 대한 협의도 그만두고 바로 울산으로 와 선거사무실만 차렸는데 땅 짚고 헤엄치기로 당선되었다.

9대 총선에서 최 후보가 외로운 투쟁을 할 때 의리를 지켜 그를 도왔던 박대해는 나중에 연제구청장을 지낸 후 국회의원이 되었다. 박정태씨는 최 후보가 내무부 장관이 되었을 때 도로공사 사장으로 가게 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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