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정치부장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꽃비, 꽃눈 또는 꽃보라라고 표현한다. 꽃 그늘에 앉아 있다 봄바람이 문득 불어 꽃눈이 휘날리면 사방은 몽환적인 세계로 변한다. 지난 2007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 ‘천년학’에는 꽃눈의 몽환 속에서 한바탕 꿈같은 삶을 마감하는 장면이 있다.

서편제 후속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송화(오정해 분)는 역마살의 우여곡절 끝에 친일파 갑부 백사 노인의 소실로 들어가 그에게 매일 소리를 들려준다. 백사 노인이 임종을 맞는 날, 매화꽃잎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가운데 송화는 남도민요 ‘흥타령’을 눈물나게 풀어낸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꿈이로다/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꿈에서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깨려는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 거냐…

송화의 소리는 매화꽃잎과 뒤섞여 백사 노인을 휘감고, 노인은 편안한 표정으로 일장춘몽을 마감한다. 이 장면의 배경은 광양 청매실농원이다. 꽃구름이 뭉개뭉개 핀 청매실 농원에서 섬진강 상류쪽으로 가면 김동리 소설 <역마>의 배경이 된 화개장터가 있다. 역마살이 낀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직도 옥화주막 등으로 남아 있다.

요즘에는 매화는 거의 지고 복사꽃이 만개하고 있다. 복사꽃 도화(跳花)는 그 고혹적인 붉은 빛 때문에 사주명리학에서 도화살(煞)이란 표현까지 나왔다. 도화살이 낀 여인은 얼굴 한 부분이 홍조를 띠며, 이런 여자를 만나면 남자는 몸이 쇠약해져 죽게 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여자를 팜므파탈(femme fatale)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도화살 메이크업으로 발전해 오히려 인기를 얻고 있다. 팜므파탈도 오늘날엔 관능미가 넘치는 여자 연예인을 의미한다.

도화살 낀 여인이든, 팜프파탈이든 한 때 화려했던 청춘의 꽃은 언젠가는 진다. 분분(紛紛)한 꽃보라 속에 일장춘몽의 한 장면이 또 지나간다.

이재명 정치부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