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해설사의 비망록-울산여지승람(26)언양성당

▲ 4월의 언양성당 앞엔 아이들의 웃음 같은 바알간 벚꽃이 피어있어 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천주교 박해가 거듭되던 시기,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숨어들었고 작고 평범한 고을에 불과했던 언양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피신한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가 되었다. 사진은 언양성당 성전.

1936년 완공된 언양성당은
울산의 가장 오래된 고딕 석조건물

천주교 박해 피해온 사람들
험준한 산세의 언양현에 숨어들어
산속에서 옹기·숯 구워팔며 기거
경상도 최초의 신앙공동체 형성

울산 3대장 언양장 인근에 위치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모처럼 여유가 생겨 언양으로 향해보았다. 24번 국도를 타고 이삼십 분쯤 달렸을까 장날이 아니어서 다소 한산한 언양시장이 나왔다. 매월 2일과 7일 5일마다 열리는 언양장은 숯과 한우, 미나리 등을 특산물로 울산태화장, 남창장과 더불어 울산을 대표하는 3대 장 중 하나이다. 한 때는 언양 상인들뿐 아니라 가까운 도시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7읍장이라 불릴 만큼 규모가 큰 장이었다.

시장을 돌아 조금 경사진 곳으로 올라가니 언양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은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봄 햇살을 한껏 받으며 댕그렁 댕그렁 종을 울리고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 위치한 천국과 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고딕양식의 석조건물은 마치 유럽의 한 모퉁이에 와 있는 듯했다. 다만 성당 앞쪽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 단지가 이 평화로움의 불청객처럼 느껴졌지만 이 또한 역사이며 인간사와 함께함이 종교가 가진 속성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36년 10월25일 완공된 언양성당은 언양지방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고 준비하여 지어진 울산지역의 가장 오래된 고딕양식 석조 건물로 현재 등록문화재 제103호로 등록되어 있다. 초대신부인 에밀보드뱅신부(Emile Beaudein, 丁道平)가 직접 설계하고 명동성당을 건축한 중국기술자를 데려와서 완공하였다. 완공 당시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 뾰족탑이 솟은 돌집을 구경했다고 한다.

본당 옆 정원에는 있는 에밀보드뱅신부의 흉상을 지나 사무실에 있는 직원에게 신앙유물전시관을 보고 싶다하니 흔쾌히 문을 열어 주었다. 신앙유물 전시관은 언양성당 성전과 함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석조 건물로 사제관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 언양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신앙유물전시관으로 개관되었다. 전시관에는 이곳을 다녀간 신부님들의 사진과 1800년대 초에 설립된 이 지역 공소 사진 등 총696점의 신앙 및 민속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영남지역의 천주교 전파는 주로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알려졌으나 언양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이 지역 향반인 창녕 성씨 가문과 해주 오씨 가문, 경주 김씨 가문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용되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언양은 불교가 융성하게 발전되어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 속에서도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고 꾸준히 이어져왔다. 즉 불교는 불교대로 유교는 유교대로 다른 지방보다 더욱 번창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종교와의 마찰을 극복하고 경상도 지방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험준한 산세를 끼고 있는 언양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천주교 박해가 거듭되던 시기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숨어들었고 그로인해 작고 평범한 고을에 불과했던 언양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피신한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가 되었다.

▲ 성모동굴

박해를 피해 산속에 피신한 신자들은 옹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그때 자신들만의 표시로 옹기에 십자가나 물고기 문양을 새겨 사용하였다. 또한 당시 관습상 상주가 외출할 때는 방갓을 썼고, 상복을 입은 상주에게는 말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도 상복(喪服)을 입고 방갓을 쓰고 다니며 신분을 감추었다.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서한을 보면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3개월 동안 죽림굴에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구유에 날곡식을 넣어 물에 불려 먹으며 박해를 피하여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렇듯 산 속으로 피신한 신자들은 앞에서는 포졸들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뒤에서는 맹수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 놓였을 것이다.

죽림굴은 1986년 언양성당 신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굴 주변에 산죽이 많아 ‘죽림굴’이라 전해진다. 주임신부님이 상주하지 않는 작은 단위의 성당을 공소라 하는데 이 지방의 첫 공소인 간월공소 (1815~1850)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대재공소(1840~1868년)의 성전으로 사용된 곳이다.

뒷산에 있는 순교자 오상선의 묘에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쉼터 옆으로 성모마리아 조각상이 보였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학문적 탐구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성모상 앞에 서니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마치 언 땅이 봄볕에 녹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누군들 어머니 그 품에 달려가 안기고 싶지 않을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것이 어머니라는 존재임을 누군들 알지 못할까 문득 문득 어머니가 떠오르면 짙은 그리움이 설움이 돼 속절없이 눈물이 흐른다.구릉지를 십 분쯤 걸어가니 언양의 첫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한 오한우의 증손자 오상선의 묘가 있었다. 오상선의 아버지 오치문과 오상선도 경신박해(1860)와 병인박해(1866)의 여파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듯 초기 신자들의 희생위에 언양의 천주교는 뿌리를 내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된 것이다.

오상선의 묘와 14처 십자가의 길을 지나가면 아름다운 천연 석굴에 조성되어 있는 성모 동굴이 있다. 낮은 산이라고는 하나 편안한 신발을 준비해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후 4시 본당에서는 어린이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당에서 뛰어놀던 개구쟁이들은 온데간데없고 새하얀 미사보를 쓴 천사들만이 고사리 손을 모으고 있었다.

성좌읍이 멀기는 먼 곳인지
어디서 이 많은 희망이 떠내려와
별이 되었다는 걸까
어디서 이 많은 절망이 피어나
꽃으로 되었다는 걸까

성좌읍 화동에 가서는
별이든
꽃이든
어느 환한 목숨 하나

▲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램프 심지에 얹어 갖고 오리라

램프를 고치러 성좌읍 화동에 가다
-류시화

돌아오는 길에 창밖을 보니 군데군데 아이들의 웃음 같은 바알간 벚꽃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떠날 땐 빈손이었는데 어느새 누군가 쥐어준 희망 한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참고문헌: <신앙전래이백년사> <천주교의 큰 빛 彦陽>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