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차바’ 피해 원인규명 용역
1%의 인재요인도 철저히 가려야

▲ 김영길 울산 중구의회 의원

지난해 태풍 ‘차바’가 남기고 간 상흔이 좀처럼 낮질 않는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는 치유됐을지언정, 내면의 아픔과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태화·우정시장과 반구·학산동 일원 주민과 상인들 입장에서는 한평생 일궈온 재산과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물폭탄을 맞고 폐허가 됐으니 그날의 아픔을 쉽게 잊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피해주민 가운데는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례도 빈번하다고 하니 우리가 어쩌면 너무 빨리 태풍 ‘차바’를 잊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피해원인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결국 이를 규명하기 위한 전문가의 조사 및 연구용역이 시작됐다.

필자가 속한 중구의회 태풍 차바 피해원인규명 행정사무조사 특별위원회 역시 지난 5개월여 동안 원인규명에 나선 결과 이번 재난의 가장 큰 원인은 혁신도시 조성과정에서 제대로 된 재난대비시설이 전무했다는 점과 복산저류조와 옥성나들문, 내황배수장이 제기능을 못한 것에 있다. 특히 이들 시설은 중구의 대표적 재해예방시설임에도 정작 필요한 순간 오작동과 가동중지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번 용역활동 역시 이들 시설을 비롯한 다양한 원인분석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문제는 원인규명을 위한 연구용역이 두 곳으로 나눠 진행된다는 점이다.

수해 피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올해 초 한국방재학회를 통해 ‘침수피해원인분석용역’을 의뢰했고, 중구청은 주민과 중구의회의 요구에 따라 대한하천학회를 선정, 이달 초 ‘태풍 차바 홍수피해원인분석 및 방지대책수립’ 용역에 나섰다. 무엇보다 이들 용역업체의 차이는 주민설명회에서 극명하게 나눴다. 한국방재학회는 당초 주민설명회도 없이 용역을 진행하려다 태화·우정 주민대책위 요구가 이어지자 지난 2월9일 LH울산혁신도시사업단에서 마지못해 주민설명회를 여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러나 대한하천학회의 경우 지난 3월3일 용역발주에 맞춰 피해주민은 물론 중구의회 태풍 차바 조사특위 위원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자발적으로 주민설명회를 열고 향후 용역 과정 등에 대해 설명했다. 중구의회 태풍 차바 조사특위 위원으로는 두 곳의 주민설명회를 모두 참석한 한 사람으로서 두 용역기관의 차이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LH로부터 용역발주를 받은 한국방재학회는 어영부영 설명회를 진행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 반면 대한하천학회는 피해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며 주민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대한하천학회는 또 중구의회와 가진 간담회에서 현재 혁신도시에 마련된 저류조만으로는 사실상 홍수예방기능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하며 태화·우정동 일원에 지하 방수로 매설을 제안하는 등 구체적 대안도 제시해 진정성이 엿보였다. 아직 용역결과가 도출된 것은 아니지만 첫 단추만 놓고 볼 때 어느 곳을 주민들이 더 신뢰할 지는 이미 불 보듯 뻔하다. 태풍 차바의 피해원인을 놓고 ‘인재(人災)’냐, ‘천재(天災)’냐 여부를 둘러싼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논란을 야기한 주체가 행정당국이나 관계기관에 있다는 점이다. LH는 7㎞에 이르는 대규모 혁신도시를 만들며 자연배수장 역할을 해왔던 많은 논과 밭, 산림을 없애고 상식이하의 저류조를 재난대비시설이라며 만들어 놓은 게 고작이다. 또한 중구는 학산동 일원 침수피해를 명확히 규명할 옥성나들문 앞 CCTV가 원인미상의 고장으로 태풍 당일 녹화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구청이 그토록 자랑하는 1000여대가 넘는 CCTV 가운데 왜 하필 그날, 그곳의 CCTV만 고장 났을까?

결국 옥성나들문 폐쇄 지연여부를 판단할 명확한 근거가 사라진 탓에 주민과 구청이 서로 불신하며 대립만 하고 있는 셈이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재난 대응의 선진국으로 꼽히는 미국과 일본은 99%의 천재라도 그 속에 단 1%의 인재요인이 없는지 철저히 가려내 재발방지책 마련에 주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99%의 인재속 단 1%의 천재요인이 숨어 있다면 이를 천재지변으로 몰아가기 바쁘다. 재난 대응에 있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는지 곰곰이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후진국형 재난대응에서 벗어나는 길은 재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먼저다.

김영길 울산 중구의회 의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