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구대산책 - 김선이作(혼합재료, 100M, 2016년)
시간이 멈추고 생명은 숨을 죽였다. 흙과 물감으로 선사시대를 불러낸다. 현대로 불려나온 과거, 서로 어울려 뒹굴며 시간은 다시 흐르고 생명은 호흡을 시작한다.

노랑 하양 초록 분홍 빨강 물감을 뿌려놓은 듯 형형색색은 어디서 왔을까. 누가 불러 들판을 물들이고 마침내 세상을 점령해 가는지. 계절은 땅과 하늘의 아름다움을 소환하는 능력을 가진게 틀림없다. 물과 물이 부딪혀 강물소리를 불러내고, 소리와 소리가 맞닿아 초록을 부르고, 초록과 초록이 꽃을 불러내고 새를 모으고 사람들을 한곳에 모은다. 불려나온 것들은 아름답다. 겨울동안 다문 입 속에서 갇혀 지내던 얼어붙은 강과 들판, 앙상한 나무들과 하늘이 이제 풍요롭다. 이러한 발걸음을 불러낸 특별한 아름다움이 궁금하다

울산 태화강 지류 대곡천 반구대 암각화에 모인 사람들. 지금 나도 누군가 부르는 음성을 듣고 여기 있는 것이리라. 따뜻한 햇살아래 발걸음을 멈추고 바위를 열람한다. 아마 바위 속 상처 입은 누군가 나를 호명해 불렀는지도 모른다. 바위에서 무엇을 불러내고 싶었다. 망원경 너머 천천히 고래를 불러낸다. 귀신고래, 혹등고래, 오린 돌고래도 보인다. 동해바다를 누비다 일부는 하늘의 고래자리로, 일부는 장생포 고래박물관으로, 남은 싱싱한 고래 몇 마리는 바위에 잠들었다 깨어난 듯하다. 작살을 맞고 잠시 정신을 잃었는지 물줄기 품어 올린다. 어린 고래 젖 먹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절의 부름에 일제히 응답한
형형색색 눈부신 봄햇살 아래
대곡천 반구대 암각화 앞에 서면
수천대 할아버지의 부름이 들려

바위 속 잠자던 고래, 멧돼지, 순록
먼 후손의 소환에 응답하듯
바위서 튀어나와 눈앞에 뛰노는듯

사람들은 그리웠던 이름을 호명하는 듯하다. 순록, 멧돼지, 호랑이를 부른다. 그때마다 바위에서 튀어나와 태화강 상류를 누비고 넓은 들판을 달리는 듯하다. 불려 나온 것들은 제 앞마당이라도 되는 듯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고요하다 못해 파르르 떠는 풀잎이 바람에 박수를 친다. 꽃잎의 함박웃음엔 향기가 고인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것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누군가의 따뜻한 목소리가 아닐까.

이곳에 고래와 멧돼지와 순록과 호랑이를 감추고 사라진 사람은 누구였을까.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수천대의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수 천년 전 이곳에선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춤을 추며 강변을 거닐었으리라. 연애편지를 쓰듯 그림을 그려 돌 속에 감추어 두었으리라. 쿵쿵쿵 공룡 발걸음 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암각화 인근 공룡발자국 화석이 깨어난 것일까. 강물이 동심원으로 흔들리고 우르르 공룡발자국 안에 발과 발이 겹친다. 공룡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남은 알은 따뜻한 봄날 부화하여 이곳 산천을 뛰어다녔으리라. 이렇게 시간은 사람과 계절, 하늘과 강, 나무와 꽃을 불러내면서 이곳을 지켜왔을 것이다.

먼 훗날 오늘같이 따듯한 봄날, 명지바람은 향기로운 꽃을 부르고 꽃은 형형색색의 빛을 불러내고, 마침내 사람들은 바위 속 잠자던 동물들을 깨워, 우리의 조상의 조상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근 천전리 각석엔 누구에게 연애편지를 보낸 듯 정성스런 글자가 남아있다. 가슴에 새겨 지듯 바위에 새겨진 글자들. 이러한 것이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이다.

우리를 모으는 힘은 아름다움이다. 고래가, 멧돼지가, 순록이 조용히 부르는 음성이 들린다. 동해의 바닷바람이 태화강 상류에 부딪히고, 강물은 맑아 물고기를 부르고 지천으로 삶이 어우러진 곳에서 바위에서 금방 튀어나온 고래와 호랑이를 만나는 기분이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이다. 오래된 이름은 따뜻하다. 한때 포켓몬고가 유행했다. 공원으로, 유적지로, 거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불러낸다는 것은 관심이고 사랑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고, 직장을 다니면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줄어들었다. 불러내지 못하고 숨겨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잊어져가는 암각화 속 싱싱한 그림처럼 뛰어나가고 싶다.

나는 무엇을 불러낼 수 있을까. 반구대 암각화엔 봄이 불러낸 아름다운 모습이 가득하다. 우리가 불러낸 그립고 아름다운 것이 암각화에 가득하다. 나는 이곳에서 강물소리와 바람소리, 꽃이 움트는 소리에 마음을 연다. 마음속에 갇혀 있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불러내지 못한 아름다움을 찾아 입안에 넣고 굴려본다. 달그락달그락 서로를 부비는 맛이 베어난다. 깊은 추억이 묻어나는 맛이다. 빈자리는 빈 것이 아니라 꽉 찬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 강봉덕씨

■ 강봉덕씨는
·201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계간 <동리목월> 등단
·울산작가회의 회원

 

 

 

 

 

▲ 김선이씨

■ 김선이씨는

·경희대 미술교육과 졸업
·개인전 22회 ·국·내외 아트페어 38회
·울산미술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울산시예총 문화상 제1회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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