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5)이후락과 10대 총선

▲ 10대 울산 총선의 특징은 오랫동안 대리인을 내세웠던 거함 이후락씨의 출마다. 이 선거에서 이씨는 기대만치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성남동에 있었던 그의 선거사무실은 울산유지들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 등 중앙의 실세들이 모두 다녀가는 등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당시 선거사무실로 이용했던 건물에는 현재 찻집이 들어서 있다.

울산 공업도시화의 주역으로
조직·자금에서 타후보 훨씬 앞질러
절대적 지지 얻을것으로 생각했으나
당초 목표였던 10만표는 얻지 못해
50% 밑도는 지지율로 당선

의정활동 통해 재기 꿈꿨지만
다음해의 10·26사태로 국회 떠나
전두환 정권서 전재산 국가에 헌납
말년 경기도서 도자기 구우며 생활
지난 2009년 85세로 영면

1978년 12월 시행된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는 유신체제의 종말을 지켜본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선거였다.

이 선거의 울산 특징은 거함 이후락씨의 출마였다.

10대 선거는 전국적으로 민주세력과 유신옹호 세력의 싸움이었고 울산으로는 유신체제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후락씨와 8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야당 투사로 떠올랐던 최형우씨의 싸움이었다.

둘 외에도 이 선거에서 공화당의 서영수, 무소속의 김재현, 이규정씨가 각각 출마했지만 선거 판세는 처음부터 둘의 싸움으로 기울었고 다른 후보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씨와 최씨는 모두 정치명운을 건 진검싸움을 벌였지만 선거결과는 실망이었다.

공업도시 울산의 주역으로 울산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던 이씨는 당초 자신의 목표였던 10만표를 얻지 못해 실망했다. 또 야권에서 민주화 투쟁으로 몸값을 올렸던 최씨 역시 이씨에게 무려 3만5000여 표나 뒤져 투사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7대 총선 때부터 자신의 출마를 염두에 두고 대리인을 내세웠던 이씨에게 10대 총선은 자신에 대한 울산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5·16후 중앙의 실세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이씨는 기회 있을 때 마다 박 대통령에게 출마의 뜻을 비췄지만 그때 마다 거절당했다. 박 정권 아래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유신체제의 산파 역할 후 박 정권의 장기집권을 받쳐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1973년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박 정권과 마지막 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쫓겨나듯 중정부장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중정에서 물러난 후 10대 총선까지 5년 동안 그가 가졌던 새로운 직함이라고는 불교조계종 신도회 회장이 전부였다.

이씨의 국회의원 출마가 수면위로 떠 오른 것은 9대 국회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다.

이씨는 1978년 9월 울산에 와 자신의 출마와 관련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 당시 경향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가 최근 울산에 와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화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씨는 이날 추석 성묘 차 울산에 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지난 5년간 정치일선에서 쉬었으니 이번 기회에 국가를 위해 다시 일해 보겠다’면서 ‘앞으로 울산에 개인 사무실을 내고 선거조직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이 무렵 중앙에서도 그의 출마가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9대 총선에서 이후락 대리인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던 김원규씨의 생전 회고다.

“9대 국회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해 만났더니 대통령께서 김 부장에게 ‘이후락이 오랫동안 놀고 있는 것을 보니 안되었다’면서 ‘이씨가 국민의 심판도 받아 볼 겸 울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면서 은근히 제가 다음 선거에는 출마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지역구를 이씨에게 양보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다음 날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공화당은 제가 당과 사전 약속 없이 지역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용서 할 수 없다면서 제명했습니다.“

김씨는 공화당에서 제명 된 후 이씨의 일등 참모로 이씨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총선이 한창 일 때 이씨의 출마와 관련 박 대통령의 언급도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은 청와대 기자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후락 본인이 이번 선거에서 울산에서 출마하겠다고 해 말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김대중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공화당 공천을 받으면 흡사 내가 김대중 사건과 관련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 무소속 출마를 권유했다”고 밝혔다.

이 무렵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한 증언을 보면 박 대통령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놓고 미국과 일본의 여론 때문에 상당히 부담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박 대통령의 말 대로 이씨는 공화당 후보가 아닌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 때 이씨가 공화당 후보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박 대통령의 언급도 있었지만 공화당 역시 이씨를 후보로 공천할 경우 정치적 부담이 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중정부장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재임 시 벌인 김대중 납치 사건 외에도 학원문제, 재벌비리 문제 등을 놓고 그때까지도 국민 여론이 좋지 않았다.

무소속 출마였지만 이씨는 조직과 자금에서 타 후보를 훨씬 앞섰다. 우선 울산의 유지급 인사들이 모두 참여해 선거인단이 헤비급이었다. 울산에서는 여당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야당 인사들까지도 이씨를 지지하고 나섰다.

노재규와 김팔용씨만 해도 최영근 계열로 골수 야당 인사였지만 공화당 조직부장을 지내다가 울산 MBC에서 근무했던 최상규씨의 설득으로 이씨 캠프에 합류했다.

서울에서도 중정부장인 김재규씨를 비롯한 전 현직 장관은 물론이고 재계와 정계 인사들 중 과거 이씨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울산의 선거사무실을 다녀갔다.

선거 20여일을 앞둔 1978년 11월 21일 경향신문은 울산 선거를 전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싣고 있다.

“다른 여당권 거물 인사와 달리 무소속으로 출범한 거함 이후락 때문에 울산의 선거분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이제는 서서히 정착되어가고 있다. 울산시 성남동에 자리 잡은 이 후보의 사무실에는 이 후보가 중앙정보부장 시절 평양을 방문했을 때 찍은 김일성과 악수하는 사진과 함께 ‘살아서 다시 한 번 이 땅을 위해’라는 표어를 붙여놓고 있다.”

이 후보는 ‘오늘의 울산을 이루는데 씨를 뿌린 사람으로 그 결과를 마무리 하는데도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울산에 대한 나의 사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당시 이씨 선거사무실은 현 동아약국 사거리에서 동헌으로 올라가는 왼편에 있었다. 현재 1층에 카페가 있는 이 건물은 이씨의 매형 윤진하씨 동생 진용씨 소유 건물로 1층에는 주택은행이 있었고 2층의 절반은 대동다방이 그리고 다른 절반은 윤씨가 운영하는 대동공무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거사무실은 3층 빈 공간을 이용했다.

선거결과 이씨는 당시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부여군의 김종필씨 보다 훨씬 적은 지지율을 얻었다.

박 정권 아래서 김씨와 항상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이씨는 이 선거에서 울산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김씨를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있었다. 그러나 김씨가 부여에서 90%의 지지를 얻은데 반해 이 후보는 50%도 밑도는 지지율을 얻었을 뿐이다.

울산 유명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자금과 인력동원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던 울산에서 이처럼 부진한 성적을 보인 것은 측근들의 과잉 충성 때문이었다.

선거를 통해 이씨에게 잘 보이려는 측근들의 과잉 충성이 득표 활동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의정활동을 통해 재기를 꿈꾸었던 이씨는 다음해 일어난 10·26사태로 자신이 주군으로 모셨던 박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국회를 떠나야 했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과거 자신의 수족으로 활동했던 전 장군이 이끄는 보안사로 불려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해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권좌에 있을 때만 해도 그는 고향 웅촌 돌내의 기름쟁이 매운탕과 장생포 고래 고기를 좋아해 별장에 머물 때면 매운탕과 고래 고기를 바치는 울산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온 국민이 놀란 7·4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말을 더듬는 것을 보고 국민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자 자신은 대뇌가 다른 사람에 비해 크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다면서 웃음을 보였던 그는 10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다시는 권좌로 돌아오지 못했다.

말년을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생활했던 그는 울산에서 지인들이 오면 반갑게 맞다가 2009년 85세로 영면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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