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레비드(Halebid)에 있는 호이살레스와라 사원. 내부 기둥들은 각기 조소적인 형태를 갖는다. 통로교차부인 중앙의 기둥들은 특별히 장식적이다. 마치 선반을 돌려 깎은 듯 원통형을 여러 줄 둘러 섬세하게 만들었다.

조소미의 극치 보이는 남인도 힌두사원
종교와 정치권력 상관관계 보여주는듯
신과 동격으로 묘사된 왕의 건축 보며
경주남산의 바위부처 자연스레 떠올려
강요된 권위 없어도 절로 드는 공경심
천여년 세월 이겨온 걸작 다시금 깨달아

인도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힌두교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힌두교는 종교이기에 앞서 인도의 역사, 문화는 물론이거니와 총체적인 생활양식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를 여행하는 이방인들이 힌두교의 형성과정이나 심오한 교리, 사회제도나 생활양식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스꽝스런 원숭이 복장의 사두들과 서커스처럼 몸을 꼬아 만든 기묘한 자세의 요가 등으로부터 그저 ‘괴상한 민간신앙’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고작이다. 갠지스 강에서 시체를 태우고, 화장한 시체의 일부가 떠다니는 강물에 목욕하는 장면까지 목도하게 되면 인디애나 존스 ‘비밀의 사원’에서 묘사된 깔리교처럼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실상 힌두교는 기원전 1500년 경 인도대륙으로 진출했던 아리안 족이 만든 브라만교에서 기원한다. 그들은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을 지배하면서 출신에 따라 직업과 신분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대물림되는 카스트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승려나 왕족, 무사와 같은 지배계급은 당연히 아리안족의 차지였을 것이다. 토착민들은 아예 카스트에 끼지도 못하는 계급으로서 천대와 억압이 당연시 되었다. 이러한 위계질서를 영속화하기 위해서는 억압을 통한 공포정치와 이를 정당화하는 신앙적 이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힌두교는 파괴와 창조, 공포와 사랑이라는 극단적 이중성이 교묘하게 복합된 모습을 갖는다.

남인도에서 만난 힌두사원들은 이러한 종교와 정치권력의 지배가 어떻게 연출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벨로르에 있는 첸나케사바(Chennakesava) 사원은 12세기에 이 지역에 호이살라 왕조가 성립되면서 지은 최초의 사원이다. 촐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지었다고 하며,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면서 당시의 왕이 자인교에서 힌두교로 개종한 것을 기념해 건립되었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국가창업의 기념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건축이었던 셈이다.

건축적 성격은 궁전과 유사하다. 넓은 대지를 거대한 성벽과 회랑으로 둘러싸고 성문과 같은 고푸람(탑문)을 높게 세웠다. 본전은 한 건물이나 주변에 많은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돌을 나무처럼 깎아 기둥과 벽과 창문, 지붕을 만들었는데 목조건축보다 훨씬 더 정교하다. 내부공간은 그 조소적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길고 어두운 통로 속에서 나타나는 현란한 조각들은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할레비드(Halebid)에 있는 호이살레스와라 사원의 내부공간은 그 조소적 예술성과 종교적 외경심을 극대화 시킨다. 본전 건물의 평면은 십자형 두 개가 직렬로 배치된 모습으로서 통로의 교차점에 홀이 형성된다. 모든 내부기둥들은 각기 조소적인 형태를 갖는다. 통로교차부인 중앙의 기둥들은 특별히 장식적이다. 마치 선반을 돌려 깎은 듯 원통형을 여러 줄을 둘러 섬세하게 만들었다. 이는 구조가 아니라 오브제인 동시에 중심공간의 신성성을 표현하는 경계장치이다.

서쪽 면은 감실로 진입하는 막다른 골목으로서 신상이 안치된 감실이 있다. 내부의 통로는 마치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공포와 외경을 연출한다. 희미한 불빛 아래 깊숙이 들어앉은 힌두 신들의 표정이 결코 온화한 모습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건드리면 엄청난 보복을 가할 듯한 공포와 위압의 모습이다. 석굴암에 앉아계신 부처님의 대자 대비한 미소는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시바신은 성격이 까탈스럽고, 시기 질투가 많으며, 파괴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 모습에서 이 땅을 지배해온 왕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들은 시바가 지상에 인간으로 나타난 것이 왕이며, 왕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고 믿었다.

외벽은 빈틈없이 부조로 채워져 있다. 건물 하부에는 수평적인 띠로 분절된 면에 음악가, 동물, 신화적 존재, 그리고 사람들을 조각해 놓았다. 부드러운 활석에 조각했다고 하지만 튀어 나올 만큼 깊은 입체감은 비견될 바가 없을 정도로 생동감을 준다. 이것은 경전이며 역사서이다. 거기에는 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영웅으로 묘사된 왕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배 권력의 당위성을 위한 정치의 신화화, 신들과 동격으로 묘사된 지배자들이 교묘하게 민중을 호도하는 선전물이 아니었을까? 신을 위한 집이 아니라 왕을 위한 건축이었음을 깨닫는다.

공포체험과 같은 동굴을 나오자 저녁 햇살이 강렬하게 쏟아진다. 문득 경주 남산의 바위부처들이 떠오른다. 골짜기 오솔길에 느닷없이 마주치는 수많은 부처들은 마치 산보 나온 동네사람처럼 친근하다. 겁나게 화려하거나 거대한 공간적 장치는 찾아볼 수 없다. 평범한 바위 면에 슬며시 나오거나 다소곳이 들어앉았을 뿐이다.

거기에는 왕이나 대사제의 영웅적인 서사나 권위를 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나 고통을 강요해 만든 것도 아니다. 아마도 민초들의 지극한 정성과 염원이 목탁소리처럼 정을 두드려 새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처는 새긴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남산골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우리 모두의 구원자로서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지난 천 여년의 세월을 이기며 종교와 예술, 건축적 수준을 초월하는 위로와 평화를 주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걸작임에 분명하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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