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6)서영수 후보의 선거전략

▲ 10대 총선 내내 서영수 후보는 여당 성향인 이후락씨의 무소속 출마로 여당 후보면서도 외로운 선거전을 치러야 했다. 당시 서 후보 선거사무실은 중구 성남동 성심병원 맞은편에 있었는데 그 동안 이 일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0대 총선서 공화당 공천 받았지만
무소속 이후락씨가 여당 예우받고
서 후보는 야당 후보 취급당해
주요 당원들부터 시장·경찰서장까지
이후락 후보 편에 서서 선거돕자
평양행, 7·4공동성명 등 폄하하고
김대중 납치사건 폭로하며 맹공격
선거후 유언비어 유포로 입건됐으나
10·26사태 일어나 재판 흐지부지
10대총선 이후 정치판 떠나

10대 총선에 출마했던 서영수 후보는 울산선거 역사상 유일하게 여당 후보면서도 선거 기간 내내 야당 후보의 예우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출마 당시 49세였고 주소는 서울 관악구 동작동으로 돼 있었다. 공천 당시 공화당 정책전문위원이었고 이전에는 농협중앙회와 국무총리실 기획조정관으로 일했다.

이후락, 최형우, 이규정, 김재현과 함께 출마했던 그는 여당인 공화당 후보면서도 2만1000여표를 얻는데 그쳐, 당선자 이후락과 최형우씨의 9만7000여표, 6만2000여표에 비해 많이 뒤졌다. 여당 후보면서도 이처럼 표를 많이 얻지 못한 것은 무소속으로 나온 이후락씨가 여당 후보 예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거초기에만 해도 그는 용감히 선거에 임했다. 이후락씨와 공화당 공천을 벌일 때만 해도 울산 사람 대부분이 공화당 공천이 이후락씨에게 갈 것이라면서 출마를 포기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공천 결과는 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며 “절대로 경합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다.

이런 그의 예상은 들어맞아 이씨의 공천이 당에 피해를 줄 것으로 생각한 공화당은 이씨 대신 서 후보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가 큰 소리를 친 것은 이 때까지였다.

당시만 해도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학연·지연·혈연을 중시했다. 그러나 서 후보의 경우 이런 연줄이 울산에 없었다. 학연의 경우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동래고보를 다니다가 서울 배재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것으로 돼 있다. 대학은 부산 수산대학교를 졸업했다.

지연 역시 부친 서진상씨가 울산 다운동 출신으로 돼 있지만 그가 어릴 때 부친이 만주로 가 공무원 생활을 했음으로 울산에서 그가 머문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 같다. 이에 비하면 혈연은 그가 출마 할 때만 해도 다운동 중심으로 서씨 집성촌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후 출마할 때까지 문중 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에서 문중의 도움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울산 출마를 결심한 것은 부친의 후광 때문으로 생각된다. 부친 진상씨는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귀국한 후 건국대를 거쳐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경남도에서 공무원을 시작했던 그는 양산과 밀양 군수를 지내는 등 문중의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다. 당시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의 권유도 출마 요인이 되었다. 길 총장의 경우 이후락씨의 출마로 공화당 공천을 노리는 후보가 없었던 울산 지구당 때문에 걱정했는데 이 때 서 후보가 나타나 그를 적극 추천했다는 후일담이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여당 후보가 되었지만 선거 기간 내내 여당 후보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그는 여당 후보면서도 야당인 최형우 후보보다 오히려 무소속의 이후락씨를 더 공격하는 선거전을 펼쳐야 했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많았다. 서 후보가 타계하기 전 밝힌 당시 선거 분위기다.

“당시 나는 명색이 집권당 후보였지만 야당 후보 취급을 받았습니다. 중앙 실세들이 모두 이후락 후보와 친했기 때문인지 시장과 군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경찰서장까지도 이 후보의 편이었습니다. 중앙당에서도 후보로 내세우기만 했지 당 조직을 나에게 넘겨주지 않아 공천장은 휴지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힘든 선거를 했었나 하는 것은 선거 전 청와대에서 열린 공천자 간담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선거 한 달 정도 남겨놓은 11월16일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 후보를 격려하기 위해 공천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애로사항을 들었다. 이 때 서 후보는 “울산의 많은 당원들이 이후락 후보 쪽으로 가는 바람에 지구당 운영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길 총장을 부른 후 “조속한 시일 내에 지구당을 재건토록하고 당을 이탈하는 당원들에 대해서는 제재를 하시오”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서 후보는 “극히 형식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청와대로 가기 전 그는 이 보다 더 난감한 사태를 맞았다. 그가 공천을 받은 후 당 업무를 인수하기 위해 울산으로 온 때가 선거 한 달을 앞두고서다. 성남동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후보자 자격으로 당원들에게 인사 한 후 관리장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당원들의 탈당을 막기 위해 “앞으로 탈당하는 당원들은 해당 행위로 보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절대로 재입당을 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이 때 김원규 전 지구당위원장이 지구당 사무실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해왔다. 김 전 위원장은 공화당 울산지구당 사무실을 당의 돈이 아닌 자신 돈으로 전세 계약을 했기 때문에 당 사무실을 계속 사용하려면 출당 조치를 받은 자신에게 사무실 계약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통보했다. 이때 김 위원장은 이미 당에서 제명되어 이후락 후보의 선거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서 후보가 택한 선거전략이 소위 말하는 네거티브 방식이었다. 서 후보는 가는 곳 마다 이후락씨를 상대로 맹공격을 했다. 그는 청중들을 향해 “이 후보가 ‘7·4공동성명’을 자신이 만들어 내었다고 자랑하지만 그의 말은 정치 쇼에 불과하다. 북한이 공동성명을 발표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땅굴을 팠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이 후보를 비난했다.

그는 당시 박 정권이 금기시 했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겁 없이 언급했다. “김대중씨를 밉다고 납치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본에 있던 김씨를 태평양에 빠뜨리려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면서 그는 “정치에는 여야가 있고 이들이 서로 견제와 비판을 해야 하는데 정적이라고 죽이려는 일이 올바른 행동입니까”라며 기염을 토했다.

그는 이런 폭로성 발언을 한 번도 아니고 삼남면 장터와 농소초등학교 등을 돌면서 연단에 올라 갈 때마다 터뜨렸다. 이렇게 되자 제일 당황했던 부서가 중앙정보부였다. 농소초등학교 유세가 끝난 후 당시 울산 중정 책임자가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도대체 집권 여당 후보가 정신이 나갔느냐”고 질책한 뒤 “김대중 사건에는 중앙정보부가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일관된 정부 정책인데 여당 후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서 후보를 나무랐다.

서 후보는 중정의 이런 경고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후보는 평양회담에서 돌아 온 후 자신이 평양에 갈 때 유사시 사용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가져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유세에서 “이 후보가 평양에 갈 때 가져갔다는 청산가리가 밀가루인지 청산가리인지 우리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말해 연단에 앉아 있던 이씨를 분노케 했다. 서 후보는 남북 협상에 대해서도 “이 후보가 북으로 가기 전 이미 키신저와 등소평이 합의한 사항을 이 후보가 심부름꾼으로 사인만 하러 간 것”이라면서 이 후보의 평양행과 ‘7·4공동성명’ 자체를 폄하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렇게 되자 중정도 서 후보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지 선거가 끝난 후 서 후보를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입건했다. 이후 그는 부산지검에 넘겨져 불구속 재판을 받았는데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긴급조치 위반은 중형이었는데 서 후보가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은 것은 그가 공화당 후보였다는 이유도 있지만 서 후보의 발언 중 ‘7·4공동 성명’과 김대중 납치폭로는 사건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정으로서는 이것을 놓고 법정 공방을 벌일 경우 오히려 한일관계가 시끄러워 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서씨는 1심에 불복 해 항소했으나 2심 선고가 내려지기 전 ‘10·26’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재판은 흐지부지해 지고 말았다.

이 후보 선거사무실은 당시 성남동 성심병원 맞은편에 있어 이 후보 사무실과 불과 20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선거기간 내내 이 후보를 상대로 좌충우돌 했지만 그의 사무실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 한적할 정도로 조용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했던 10대 총선 후 정치를 떠났던 그는 개인 기업체에서 잠시 일하다가 2005년 영면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