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않는 오만과
무지에 의한 편견은 혹독한 대가 치러
경청·소통·배려 실천하는 사회 만들어야

▲ 이광복 국회 입법정책연구회 부회장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는 저서 <역사의 파편들>에서 “미국이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1890~1969)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실제로 토머스 제퍼슨(미국 3대 대통령, 독립선언서 기초자)의 숭배자이도 했던 호치민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베트남의 독립만 인정해주면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친서까지 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호치민의 진심을 묵살했다. 오로지 ‘동남아 공산화 우려’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호치민과 베트남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전쟁이었다.

인간은 미지의 대상에 두려움을 느낀다. 실체와 무지의 간극은 편견으로 채운다. 두려움부터 편견까지 덧칠된 존재는 공격 대상이 된다. 결국 선전선동에 자극 받은 관망·무관심층까지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면 사단이 난다. 먼저 미지의 대상을 ‘악마화’하고, 퇴마의식 치르듯 사냥에 나선다. 이때 작동하는 심리 기재가 ‘오만’이다. “내게 악마를 단죄할 권능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 딱 그런 사례다. 대가가 참혹했다.

우리는 ‘나’ 아닌 상대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진보는 보수의 참모습을 알고 미워하는가? 또 보수는 진보의 정신을 파악하고 비판하는가? 맨살 부대끼며 정치를 논하고 국정의 축을 나눠 지탱해온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진보와 보수는 여전히 서로를 악마라 부르며 청산 대상이란다. 그 폐해는 심각했다. 지금 미국 대통령이 ‘손해’라는 한미 FTA는 우리나라에선 발효 전까지 매국행위로 매도당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는 공포와 편견과 오만의 결정판이었다. 두 사례 모두 우리에게 천문학적 비용의 국력낭비, 추산 불가한 기회비용 손실을 안겼다.

그런 행태는 비단 정치를 업으로 삼거나 그 언저리에 머무는 자들만의 돌림병이나 유전병이 아니다. 보통사람들도 편견과 오만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된다. 도로 위의 여성 운전자나, 인맥의 끈이 짧은 직장인이 일상에서 겪는 불공정함도 편견과 오만의 산물이다. 교과 성적 낮은 학생의 진짜 소질이 사장돼 버리는 것도 학부모, 교사, 우리사회의 편견과 오만 때문이다. 뛰어난 기술력과 미래지향적 철학을 갖춘 신흥기업들이 한철 메뚜기처럼 사라지는 것도 2, 3류에 대한 우리사회의 편견과 오만이 만든 비극일 터이다.

질병수준의 그 모든 ‘소아병적·문화 퇴행적 행위’의 치료제는 경청·소통·배려의 선물인 ‘상호존중의 사회분위기’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경청과 소통, 그리고 배려는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만의 숙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스스로 풀지 못할 일일 수도 있다. 오히려 인기영합적 속성을 가진 그들의 ‘못된 버릇’을 고칠 최선의 방법은, 보통사람들이 경청·소통·배려의 실천을 일상화하는 것이리라.

한번 말하기 전에 두 번 듣자. 미운 사람의 말도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 노력하자. 누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자. 내가 싫어하는 일은 남들도 똑같이 싫어한다는 것을 되새기자. 소문은 일단 의심하자.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자. 그렇게 우리 주변에서 편견과 오만을 쫓아내자. 이상의 생활양식을 일상의 준칙으로 삼자. 우리 아이들에게도 가르치자. 미움을 전파하고 공격과 파괴를 조장하는 자칭 사회지도층들은 내가 먼저 꾸짖자.

우리가 사는 곳은 완벽한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궁극의 목표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존을 위해 구성원 모두가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이 5천만 국민 모두가 지고 있는 책무임을 인식하자. 가까운 훗날, 경청과 소통과 배려의 땅에서 우리 모두가 존중받기를.

이광복 국회 입법정책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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