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반구대(盤龜臺)가는 길

▲ 하늘에서 내려다 본 반구대 대곡천 전경.

‘암각화박물관’서 첫걸음
20년 연륜의 ‘반구교’ 지나
기암절벽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대곡천’ 따라 발걸음 내딛어
시인 묵객의 소통의 장 ‘집청정’
정몽주 위패 봉안된 ‘반구서원’
반구대 앞 벼랑길·흙길 지나면
태고의 신비 간직한 ‘암각화’

여기 아름다운 하천이 있다. 여기 아름다운 하천 곁에 아름다운 길이 있다. 물길을 따라 흙길을 걷다보면 그 곳에 절경(絶景)이 있다. 그곳에 반구대(盤龜臺)라는 이름의 선경(仙境)이 있다. 만화방창(萬化方暢)에 햇볕 좋은 봄날, 반구대 가는 길 그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반구대안길에 위치한 암각화박물관. ‘설령 도둑이 들어온다 해도 훔쳐갈 것이 없는 박물관입니다’ 라는 박물관 관장님의 유머러스한 멘트가 떠올라 유쾌한 공감을 밝히면서 박물관을 나섰다. 훔쳐갈 것은 없지만, 결코 훔쳐갈 수 없는 최고의 가치, 그 이상의 가치가 전시되어 있는 암각화박물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겨 반구대 가는 길로 방향을 잡는다. 곧 이어 나타나는 다리, 반구교(盤龜橋)다. 빛 바랜 교명판에는 20년의 연륜이 묻어있고 다리 앞을 지키고 선 나무에는 하얀 빛깔의 앵두꽃이 한창이나 곱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는 4월의 시냇물이 한가롭게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하천 가운데 ‘한국의 아름다운 100대 하천’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대곡천’이 흘러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겁의 세월을 흐르고 흘러도 아직도 다 못다 흐른 대곡천, 기암절벽을 끼고 흐르는 곡류하천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굽이굽이 선의 유려함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곳. 그 대곡천 물길을 따라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 반구서원 편액.

다리를 건너자마자 길은 굽어진다. 대곡천 물길 건너편 기암괴석 틈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분홍빛 선연한 진달래를 눈에 담으며 구부러진 길을 걷노라니 걸음은 더욱 느려지는데, 대곡천 푸른 물은 마치 땅위의 사람과 동행이라도 하려는 듯 사람의 걸음보다 더 느리게 흐르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이윽고 다시 한 번 더 굽어진 길을 돌아서니 이번에는 길이 길게 이어진다. 길가에는 수령이 한참이나 된 키 큰 나무들이 시원스레 서있고 가지마다 연록의 잎들이 이른 녹음(綠陰)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잠시 쉬어간들 어떠랴.

▲ 반구대 암각화 입구 길.

정갈한 돌계단에 앉아 건강한 나뭇잎 사이로 물발처럼 스며드는 봄날의 햇살을 본다. 사각거리는 댓잎소리가 청정한 바람을 타고 온다. 아가의 체취 같은 파릇한 풀 향기가 발등을 타고 올라온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보는데, 대곡천의 공기는 너무나도 명징하다.

‘오늘 누군가가 그늘에 앉아 쉴 수 있는 이유는 오래전에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워런 버핏의 어록(語錄)을 떠올리다가 마주하게 되는 오래된 목재 건축물, 얼핏 보기에도 긴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역력한데, 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의 가벼움을 무거운 침묵으로 붙들고 서있는 정자(亭子)가 있으니 이름하여 집청정(集淸亭)이다. ‘맑음을 모으는 정자’라는 의미로, 청백리 병조판서 최진립(崔震立)장군의 증손 운암 최신기(1673~1737)가 세운 정자다.

가까이 가보니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걸려있는 편액의 이름이 다른데, 오른쪽은 청류헌(聽流軒)이요 왼쪽은 대치루(對峙樓)라.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집이요, 서로 마주하고 바라보는 루라는 뜻으로, 그 의미의 심오함이 자못 깊게 다가온다. 예부터 집청정은 이 곳 대곡천을 찾는 시인 묵객의 소통의 장이었다고 한다.

조선후기부터 구한말까지 수많은 시인들이 40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작품들을 운암의 후손이 정리하여 <집청정시집>(集淸亭詩集)으로 묶은 바 있다. 이 ‘시집’에는 조선 숙종과 영·정조 때의 문신, 학자, 경상도관찰사 및 인근 지역의 수령들의 이름이 올라와 있으며, 숙종 때의 문신 권해(權瑎)의 반구제영(盤龜題詠) 또한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집청정은 문인들의 창작과 소통의 장소인 동시에 예와 도를 배우는 공간이었음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또한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작품 ‘반구(盤龜)’와 함께 겸재가 아니면 그의 손자 정황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언양반구대’에도 집청정으로 보이는 정자가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 반구대는 아름다운 곡류하천에 취한 많은 시인 화가 묵객들이 시를 남기고 경치를 완상하던 곳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집청정은 현재 울산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정자 가운데서 그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되고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좋은 것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하니, 집청정 앞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자연 길어질 수밖에 없다.

1375년~1377년, 언양 요도에 유배를 오게 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은 작괘천에 이어 이곳 반구대를 찾아온다. 그리고 선생은 언양의 산수(山水)는 작괘천과 함께 반구대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며 이 곳의 경치 감상하기를 매우 즐겼다 해서 이를 기리어 ‘포은대’라는 글자를 새겨 반구대를 일명 ‘포은대’라고도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그날 선생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집청정 앞에서 멈추었던 발길을 이제 반구서원으로 향해 옮겨 놓는다. 반구서원은 포은선생이 다녀간 이후 영남의 유생들이 1712년에 이곳에다 서원을 창건하여 성리학 발전에 큰 공을 세운 포은 정몽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등 삼선현의 위패를 봉안해 놓고 있는 곳으로 해마다 음력 3월 중정(中丁)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반구서원을 나와 맞은편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일명 ‘비래봉’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반구산(265m)이다. 산의 생김이 거북이 몸통 형상을 닮아있고, 또한 거북머리 형세의 세 층으로 된 바위 덩어리가 물위에 떠 있는 모양이, 마치 엎드린 거북(盤龜)과 비슷하다고 해서 반구대라고 불리고 있는데, 가히 아리따운 절경임에 틀림이 없다.

구부러진 길은 대곡천을 곁에 둔 채 낮은 산을 끼고 가파른 벼랑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진다. 향로봉 비탈에 ‘연로개수기’라 적힌 익숙지 않은 안내판이 붙어있다. 반구산 건너편에 있는 이 산길은 너무 좁고 미끄러워 지나는 사람들이 떨어지는 사고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순치 1655년 낭떠러지 길을 개보수 하였으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바위에 기록 한 것이 연로개수기이다. ‘연로’는 벼루길이라는 뜻으로 벼루처럼 미끄러운 길이라 표현되었으니, 그 비유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무척이나 적절하게 읽혀지는 반구대 앞 벼랑길이다. 한참이나 비탈진 벼랑길을 내려오니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 홍중표 자유기고가 (전)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누구나 ‘반구대암각화’라 부른다. 하지만 반구대에는 암각화가 없다. 암각화가 반구대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서 편의상 반구대암각화라 칭했던 것이 고유명사가 되어, 지금은 반구대암각화라 스스럼없이 통칭되고 있는 것이다. 암각화는 이 곳 반구대에서도 천천히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런 연유로 정작 반구대의 풍광과 대곡천의 절경 등 그 멋스러운 가치가 암각화의 이름에 가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염려가 든다. 그런 염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의 바람을 지닌 채 습지 위로 놓아진 다리를 건너자 대숲이 나타나고 대숲을 지나자 곧 불그스레한 빛을 띤 호젓한 흙길이 눈에 들어온다. 도심의 아스팔트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촉감, 땅을 딛고 흙을 밟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그 부드러운 발의 촉감을 한껏 만끽할 즈음 태곳적 신비가 어린 곳에 육천년 넘은 비밀을 간직한 바위가 나타난다. 바로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이다.

홍중표 자유기고가 (전)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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