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선관위-경상일보 공동기획 ‘선거와 희망’

▲ 신연재 울산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안보는 위협받고 경제는 성장을 멈춘 이중의 위기 상황이 지속되면서 우리 국민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국민을 안심시켜야 할 책무가 있는 정치권은, 그럼에도 극단적 대립과 갈등을 일삼고 있어서 오히려 혼란과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정치의 역할이 분열과 갈등을 극소화하고 통합과 협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대선 후보자와 정당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특정 정권을 뛰어넘어 장기적으로 타당할 수 있는 비전과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각 후보자와 정당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국민의 검증을 통과함으로써 수권 능력을 입증해야 마땅하다. 깊이있는 정책 검증없이 선출된 지도자가 국가의 운명을 얼마나 위태롭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탄핵 사태는, 대선 후보자들에 대한 철저한 검증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그런데도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우리 정치의 고질적 풍토가 여전한 가운데, 상호 검증은 정쟁으로 전락하기 일쑤여서 검증의 본질을 희석시키곤 했다. 검증을 하더라도 정책 검증보다는 도덕성 검증에 더 치중한 탓에 철저한 검증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각 후보자를 철저히 검증하는 선거 제도의 도입이 이런 점에서 절실한 과제로 등장했다.

현재 상태에서 이런 요구에 가장 잘 부응할 수 있는 선거 제도는 정당과 후보자들의 정책 및 공약의 타당성을 세부적으로 검증하는 매니페스토 선거이다. 매니페스토 선거의 핵심은 구체적 공약 목표, 그 이행 기간과 일정, 그리고 재원 규모와 확보 방안을 포함한 일종의 정책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후보자와 정당은 구체성·현실성·타당성을 갖춘 공약을 제시하고, 유권자들은 공약을 비교·평가하여 집권 세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매니페스토 선거를 하면 정책 경쟁이 선거의 중심이 되고, 공약으로 제시된 정책의 성패에 따라 정치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물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민주주의 체제의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의 의사는 정책으로 연결되고, 유권자는 정책을 구체화한 공약에 대하여 과거의 실천 실적과 미래의 이행 가능성을 평가하여 후보자와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선거가 이렇듯 정당과 후보자 선택 과정이자 정책 선택의 기회라면, 매니페스토 선거의 도입 필요성은 더 커진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에서는 연고주의, 지역주의와 할거주의, 감성적 선거 운동이 관행으로 자리 잡은 결과, 인물과 정당의 이미지가 유권자의 선택에 크게 작용해 왔다. 우리의 선거 풍토가 그러했던 한, 후보자들이 공약을 제시하면 언론과 시민단체 등이 그 현실성과 타당성을 검증하고, 유권자는 이를 바탕으로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의 매니페스토 선거가 제도화될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비전은 있으되 구체적 실행 계획은 결여한 상태에서 국민에게 투표를 요구했고, 국민은 선택의 구체적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선거주권은 정책과 검증이 실종된 선거가 반복되면서 상당 부분 유린되었다. 탄핵 사태는 부실한 검증이 불러온 참사이지만, 동시에 기존 선거 제도의 맹점을 부각시켜 매니페스토 선거의 도입에 필요한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 여건이 마련된 지금이야말로, 정책 경쟁과 검증을 핵심으로 하는 매니페스토 선거 제도의 도입으로 유명무실해진 선거주권을 국민에게 되살려 줄 호기이다.

신연재 울산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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