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7)울산의 남산 사람들

▲ 이재걸씨는 이후락 중정부장 시절 감찰실장으로서 이장우 비서실장과 함께 이 부장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중정에서 물러난 뒤 ‘박영복 금융 대출 사기사건’ 때문에 검찰에 불려 다니는 등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씨가 중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때 그의 부친 상수씨는 성남동에서 삼일여관을 경영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신한은행이 들어서 있다.

우석 대통령비서실장때부터
고향사람들 중앙 요로에 진출시켜

우석의 5촌 외조카 이장우씨
중정 비서실장 맡아 방북때도 동행

청렴결백했던 판사 이재걸씨
1971~1973년 중정 감찰실장 활동
우석 물러나자 美서 국제변호사로

중앙정보부는 18년 박정희 정권을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 등 그의 심복들을 중정 부장자리에 앉혔다. 이들 중 우석 이후락씨가 박 대통령의 마음을 가장 잘 읽고 그의 구미에 맞게 정보부를 운영했다는 평가다.

중앙정보부를 ‘남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것은 중정이 남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 정권 시절 ‘남산’은 권력의 심장부였다. 우석은 취임 후 남산이 박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청와대와 멀다면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19층에 중정 사무실을 따로 두고 이곳에서 주로 일했다. 박 대통령을 잘 보좌하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중정 모임도 정부종합청사에서 가질 때가 잦았다. 당시 중정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정부종합청사 19층 전부를 중정 사무실로 사용했고 중정 직원들을 위한 승강기도 따로 있었다.

우석은 박 대통령과 더 가까이 있기 위해 청와대가 더 가까운 궁정동 안가에 머물 때가 많았다. 최형우 의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처음 우석을 만났던 곳도 이 안가였다.

주일 대사로 갔던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다시 국내로 들어온 것이 1970년 12월 21일이었다.

이날 김포공항에는 많은 장관과 김병희, 김택수씨 등 공화당 국회의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공항도착에 앞서 우석은 중정에 전화를 걸어 축하 화분이나 선물을 받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중정부장에 오른 후 우석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조직개편과 인사였다. 박 대통령이 우석의 전임자인 김계원 부장을 일 년 남짓 만에 교체한 것은 다음해 있을 7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7대 대선은 박 대통령이 3선 개헌 후 처음 치룬 선거로 민심이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으로 많이 기울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박 대통령은 이런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우석을 불렀다.

박 대통령은 나중에 “7대 대선을 앞두고 무리한 3선 개헌으로 여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 때 지략가 조조가 떠올랐다”면서 우석을 ‘꾀보 조조’라 칭하면서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이유를 밝혔다.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차장은 김계원 부장과 함께 일했던 김치열씨였다. 우석은 김 차장을 교체할 생각이었으나 박 대통령이 김 차장을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계획을 바꾸었다.

우석은 대통령비서실장 때부터 울산 사람들을 많이 챙겼다. 울산사람들은 지금도 우석이 공단 건설과 학교 건립 등 울산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이에 못잖게 울산 인물들을 중앙 요로에 많이 진출시키고 키운 것을 높이 평가한다.

정보계통 출신이었던 우석은 대통령 비서실장 때부터 중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최종두, 이용호, 김종학, 윤종명 등 울산 젊은이들이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 찾았을 때 이들에게 중정요원이 되기를 권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우석은 이들에게 4개월의 훈련만 받으면 중정에 넣어주겠다면서 이들을 천거했다. 우석은 이 때 특히 김종학을 중정으로 가라고 권유했지만 나중에 울주군수가 되는 김씨는 “중정보다 실장님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 결국 청와대에서 민원을 챙겼다.

중정으로 가면서 우석은 울산 인물들을 많이 데리고 갔다. 이장우, 이재걸, 허용만, 이상호, 정상만, 오경환, 이구락, 김영호, 이홍우, 박만식, 이복 등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우석은 특히 중정이 국가안보와 관련된 기관인 점을 고려해 울산 출신의 고급 장교들을 대거 중정에 포진시켰다.

우석이 김종필과 함께 박 정권의 버팀목이었다면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있는 동안 수족으로 활동한 인물이 이장우와 이재걸씨다.

우석이 중정으로 가면서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던 이장우씨는 순장조로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있는 동안 그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혈육으로 보면 이씨는 우석의 5촌 외조카가 되어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 그러나 둘의 인연은 깊어 우석은 군에 있을 때부터 휴가를 오면 당시 진하 부자였던 장우씨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이후 우석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는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했고 우석이 주일대사로 갈 때도 대사 1급 보좌관 자격으로 일본에서 우석을 수행했다. 우석이 중정부장이 되자 그는 정부종합청사에 비서실장실을 마련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비서실장으로 있는 동안 울산에 총선이 있을 때마다 우석이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후보들을 지원했고 우석이 박 대통령 밀사로 방북을 할 때도 동행했다. 또 유신이 터져 이일성과 이영채 등 울산 야당 인사들이 서울로 피신한 후 중정에 자수했을 때도 그가 허용만과 이재걸씨를 불러 신병을 인도했다.

우석이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도 우석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이씨는 우석이 중정에서 물러난 후 신병치료차 영국으로 갈 때도 도왔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우석의 해외여행을 금지해 놓은 상태였는데 이씨가 역시 울산출신으로 김포공항 분실장으로 있었던 박영대씨에게 부탁해 우석을 빼돌렸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박씨는 나중에 해고가 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때는 우석과 그가 함께 미국에 오래 머물러 국내 언론으로부터 도피성 외유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법조인 출신의 이재걸씨도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있을 때 감찰실장으로 우석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중정은 대공 업무와 국내 고위 인사들에 대한 사찰 업무를 함께 해 권력이 막강했다.

따라서 중정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감찰실장이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한 우석이 영입한 인물이 울산 출신의 이재걸 판사였다. 이씨는 당시 법조계에서 청렴결백한 인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울산사람들 대부분은 이씨가 검사시절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그를 검사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중정에 오기 직전 판사로 활동했다.

울산 성남동에서 태어나 1956년 제7회 고등고시에 합격했던 이씨는 검사 시절 서울 지구 밀수합동수사반에 들어가 군납업자들의 원자재 밀수를 적발하는 등 명성을 날렸다.

검사직에서 판사로 이동한 것이 1969년이고 1970년 6월에는 서울고법 판사 자격으로 판본방직 밀수 사건 때는 고향 출신의 서갑호 사장에 대해 직접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가 중정 감찰실장으로 간 것이 1971년이다. 이씨는 울산 출신의 손영길 장군과도 친해 윤필용 수경사령관과 우석이 긴장상태에 있을 때는 둘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중간역할도 했다. 손 장군은 우석이 중정부장이었을 때 윤 장군의 참모장으로 있었다.

당시 윤 장군은 박 대통령의 신임 아래 군 최고 실력자로 우석과 친했지만 때로는 경쟁 관계를 갖기도 했다.

1973년 우석이 물러날 때 함께 중정을 나온 이씨는 5개월 뒤인 1974년 4월 ‘박영복 금융대출 사기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여러 번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이때 그를 조사했던 사람이 중정 차장으로 모셨던 김치열 검찰총장이었다. 그는 결국 무죄로 판명되었으나 이후 미국으로 가 미국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운명했다. 그러나 ‘박영복 금융대출 사기사건’은 1979년까지도 수사가 계속되어 그가 미국에 있을 때도 소환문제로 검찰에서 논란이 있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가 서울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부친 이상수씨는 울산 성남동에서 삼일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삼일여관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후지깡(富土屋)여관이 있었지만 해방 후 이 여관이 소실된 후 이씨가 신축해 운영했는데 지금은 이 자리에 신한은행이 들어서 있다.

1960년 5대 총선 때는 정해영 후보가 지리산 빨치산 출신으로 <남부군>의 저자 이우태씨를 데려와 선거본부를 차려놓고 민주당 김택천 후보와 선거운동을 펼쳤던 곳이 이 여관이었다.

울산의 땅 부자로 시내에 부동산이 많았던 이상수씨는 아들의 권력과는 무관하게 울산에서 평범하게 살았다. ‘박영복 금융대출 사기사건’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이재걸씨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는 다시 울산으로 오지 않았다.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있을 때 중정으로 꼭 데려가고 싶은 울산농고 후배가 있었지만 영입 못한 인물이 있다. 그가 손영길 장군이다. 손 장군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 편에서 하자.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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