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 AS·학부모 상담 등
누군가의 근무시간과 충돌
딜레마 해결방안 함께 고민을

▲ 안미수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정책연구팀장

“딩동댕~ 아파트 관리실에서 알려드립니다”는 방송이 울린다. 전염병 예방을 위해 각 세대마다 소독을 해 주겠으니 적극 협조해달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위생관리인데 관리사무소에서 해주겠다니 기꺼이 협조하려 했는데, 소독을 위한 세대 방문 시간이 오전 9시부터 4시까지란다. 이런…. 협조해줄 수가 없다. 그 시간은 근무시간이고, 집에 아무도 없다.

맞벌이 또는 1인 가구는 같은 고민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활가전이나 집 내부 어딘가 고장이 나면 전문기사가 방문해야 하는데, 기사 방문시간이 일반적인 근무시간(오전 9시~오후 6시)으로 제한돼 있는 경우가 많다. 근무 외 시간에 추가 요금을 더 받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그런 추가요금 없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도 있다. 그러나 아직 아파트 내 관리사무소의 세대 서비스부터 공공기관, 은행 등의 공공 서비스까지 일반적인 서비스 제공시간은 ‘이상적인’ 근로시간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맥락에서 학부모들은 학부모총회, 공개수업, 학부모 상담, 심지어 급식 배식까지, 낮 시간에 개최되는 각종 학부모 초청 행사에 난색을 표하기도 한다. 이런 일정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단계를 넘어 ‘내가 집에만 있는 사람이냐’고 분통을 터뜨리기까지 하는 것은 주로 엄마들, 특히 그 중에서도 직장맘들이다. 학교에서는 학부모와 함께 열린 교육시스템을 운영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로 개최했겠으나 그 시간에 누군가, 즉 엄마(전업주부)가 집에 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전제 하에 낮 시간의 학부모 행사를 연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야간에 행사를 열면 그 시간에 아이는 누가 돌보냐는 민원이 있다고 하니 학교 측에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개인 삶의 방식 및 가족 구조의 다양화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누군가의 근무시간과 다른 누군가의 근무시간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는 어느 한 쪽에 비난의 화살을 돌릴 문제가 아니다. 어느 방향으로 그 화살이 향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돌아봐야 하는 건 아닌지 근본적인 점검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암묵적으로 낮 시간동안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가정 하에 서비스 제공시간을 설정하고 있다. 산업혁명 초창기부터 형성된 ‘이상적인 노동자(Ideal Worker)’의 모습은 전통적인 직장문화에서 요구하는 노동자의 모습, 즉 자신이나 가정보다는 조직에 충성하는, 언제나 일이 우선인 노동자가 바람직하다는 통념이 반영돼 있다. 요즘에는 이런 이상형과 다른 생각을 가지는 세대들의 출현으로 약화되는 듯 보이지만 직장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근로자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아침에 눈 뜨기 바쁘게 출근한 후 9시부터 6시까지 풀타임으로 8시간을 근무하고 이후 필요하면 야근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이상적인 근로자’들의 생활에서, 집안의 일은 집 안에 있는 누군가가 알아서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 누군가는 아침 출근 시간 이전의 아침식사와 퇴근 시간 이후 저녁식사를 담당해야 하고, 그 외에 빨래, 설거지, 가전제품 등의 수리와 공과금 등 쉴 틈 없는 집안일을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보통 주부, 즉 남성보다는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의 가족·가구 변화를 떠올려 보면 전체 가구 중 27% 이상이 1인 가구로 2인 가구를 넘어섰고 9% 이상이 한부모 가족일 뿐 아니라 전체 유배우가구 중 42% 이상이 맞벌이가구인 상황에서 낮 시간에 집안에 누군가 있을 가능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 근로자든, 은행 직원이든,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근로자든 누구나 근로자로서 정해져있는 근무시간, 즉 월요일부터 금요일,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것이 정상적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일할 때 일하고 다른 사람들이 쉴 때 쉬는 것, 그것이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원하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대낮에 누군가 집에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의 휴식시간이 누군가의 근무시간이 되어야 하는 딜레마를 해결할 방안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필요하다.

안미수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정책연구팀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