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언양읍성

▲ 지난해 11월 경상일보가 주최한 ‘언양읍성 둘레길걷기’에 참가한 시민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성벽 주위를 걷고 있다. 경상일보 자료사진

마을·도시 가까이 형성된 평지성
유사상황시 백성들 보호에 효과적
북문 계건문은 원형 대부분 남아

성벽 사라지자 벽화마을로 들어서
오영수선생의 일대기·작품들 벽화로
이어 복원된 옹성 남문 영화루 나타나

흔적만 남은 읍성
사람없는 민가·학교
가슴에 공허한 메아리 맴돌게해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두 가지의 햇볕 밀양과 언양 중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2007년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 밀양에서는 밀(密)자를 빽빽하다는 뜻 대신 은밀하다라고 풀이해 Secret Sunshine(비밀스런 햇볕)으로 밀양을 표현했다. 글자 한 자 달리 해석했을 뿐인데 밀과 양 서로 대조적 의미로 극 전체를 대변해 줄뿐 아니라 도시의 이미지도 바꾸어 놓았다.

또 다른 볕 언양의 한자 풀이를 보면 선비 언(彦)에 볕 양(陽)자를 써 선비들의 따뜻한 고을로 풀이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언양 지역에 유학이 발달했던 것을 보면 이 또한 바람직한 지명 풀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언자 속에는 크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남구문화원에서 발간한 울산지명사에 따르면 언양은 고헌산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한문표기 지명에 있어 양(陽)은 산의 남쪽 또는 강의 북쪽을 뜻한다. 따라서 언양의 옛이름 헌양은 고헌산 남쪽을 뜻하는 고헌산 아래 양달진 고을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양달진 고을의 중심에 언양읍성이 자리하고 있다. 언양읍성은 왜구들의 침입이 빈번하던 고려 공양왕 2년에 이를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그 후 1500년(연산군 6년)에 현감 이담용의 관리 하에 석성으로 쌓아졌으며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617년(광해군 9년)에 새로 쌓았다.

우리나라 성은 언양읍성처럼 평지에 조성된 평지성, 경사가 급한 산지에 위치하는 산성, 산과 평지를 끼고 조성된 평산성이 있다. 이 중 평지성은 오로지 성벽의 높이에 의지하여 방어해야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마을과 도시가 가까이에 형성되어 사회적 관계가 서로 긴밀할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성안으로 백성들이 들어올 수 있어 효과적으로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계건문(啓乾門)이라 불리던 북문은 원형 그대로의 성벽이 꽤 남아있는 편이다. 큰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기초석을 삼았고 그 위에 큰 돌을 얹고 돌과 돌 사이에는 많은 잔돌을 끼워 매우 견고해 보였다. 주변에 쑥이 지천으로 깔려 언제 시작했는지 봉지가득 쑥을 캐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는 말은 아마도 쑥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쓰임새가 다양하며 그 효능 또한 뛰어난 반면 봄이면 어디서든 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신폭신한 풀밭 길을 걸어 서문 쪽으로 갔다. 부릿보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물길 따라 키 작은 돌미나리가 있고 예전엔 성벽이었을 돌 틈엔 돈나물이 나있었다.

“기다림은 길고 만남은 짧은 사랑” 드라마의 대사를 읊조리게 하는 서문의 이름은 애일루(愛日樓)다. 하루 종일 아무 기별 없다 일몰에 잠깐 비치는 해를 향한 사랑을 담은듯하나 애일루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햇볕이 마을 전체에 퍼져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그 햇볕 사이를 가로질러 흙길에 바퀴자국을 남기며 남문을 향해 달려간다.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

라디오도 영화도 몰랐다.

그래도 소년은 마을 아이들과 함께

마냥 즐겁기만 했다.

성터 돌무더기 밑에 너구리 굴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 너구리 굴에다 불을 지폈다.

-오영수 ‘요람기’ 중에서

이곳 읍성은 고장난 시계처럼 과거로의 여행길을 안내했다.

조금 더 가니 치성 가운데 새 둥지인양 들어앉은 민가가 보였다. 치성은 성벽에서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측하고 전투 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이다. 언양읍성에서 확인된 치성은 장방형으로 총 12개, 성벽의 각 모서리와 동서남북 성문 좌우 각각 2곳에 배치되었다.

민가 속으로 사라져 찾을 길이 없는 성벽을 뒤로한 채 다가구주택을 지나 남문 4길로 들어서니 담을 따라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언양초등학교 학생들의 꾸밈없는 그림을 비롯해 작가 오영수선생의 일대기와 그의 작품들이 벽화로 조성되어 있다.

벽화를 구경하다보니 새롭게 복원된 남문 영화루(映花樓)에 도착했다. 남문인 영화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구조이며 성벽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 있는 개거식이다. 그리고 성문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옹성(甕城)을 둥글게 쌓았는데 그 형태가 항아리 같다고 해서 옹성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옹성은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적이 아무리 많아도 옹성 안에 들어 올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군 쪽에서 공격하기가 쉽다.

옹성 위에 올라 성 밖을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이 봄날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사라졌을까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볕이어서 더욱 가슴 시리게 아픈 이야기가 성벽 곳곳에 묻어있을 것이다.

▲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역사는 흘러 읍성은 흔적만 남았고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긋한 미나리 향만이 발길을 재촉한다. 망월루(望月樓)인 동문에는 미나리 밭이 있고 밭에서 금방 캐낸 신선한 미나리들이 수레에 실려 있었다.

언양읍성은 1966년 12월27일 사적 153호로 지정되었음에도 1983년에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낙안읍성과 비교해보면 여러 면으로 안타까운 점이 있다.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한다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민가들이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없는 학교는 가슴에 공허한 메아리만 맴돌게 한다.

북문으로 돌아와 아쉬움에 성벽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누군가 인생은 유리병 같아 그 안에 모래, 자갈, 돌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모래부터 채우면 자갈과 돌을 병속에 넣기 힘들지만 돌을 채우고 그 틈에 자갈을 채우고 나머지 틈에 모래를 넣으면 인생이란 유리병에 가득 담을 수 있다. 성벽은 이러한 원리를 담고 있느냥 눈앞에 서 있다. 그럼 우리에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돌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모래밖에 안되는 일을 돌로 착각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을까?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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