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8)손영길 장군

▲ 우석 이후락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우석의 사조직인 ‘청수회’ 회장으로 있었던 김영호씨는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우석이 중정부장이 되자 중정에서 근무하게 된다. 김씨의 부친 기봉씨는 태화동 부자로 해방 후 태화저수지를 개축할 때 거금을 희사했는데 당시 세운 공덕비가 아직 태화저수지 제방에 있다.

울산농고 11회·육사 11기 졸업생
영남출신 장교 모임 ‘하나회’ 활동
회원 중에서도 대통령 신임 받아

1973년 윤필용 장군 쿠데타 혐의로
참모장이었던 손 장군도 15년형
전두환 정권때 미국서 들어왔지만
권좌에 앉지않고 조용히 여생보내

중정 의무실서 근무한 김영호씨
성안 출신 중정 5국장 오인태씨 등
그시절 중정에 울산인물들 많아

해방 후 울산은 신말엽, 오경환, 이상무 등 많은 장성들을 배출했다. 신말엽은 삼남면 출신의 4성 장군으로 3군사령관과 육군참모차장을 지냈고 동구 남목 출신의 이상무는 해병대 사령관, 그리고 웅촌 출신의 오경환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오 사령관의 경우 웅촌을 일찍 떠나 어릴 때부터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산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웅촌이 고향이다. 그가 해군 준장 때 중정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웅촌 출신의 이후락씨가 그를 동향 출신으로 보고 아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화려한 군 경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울산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군인이 손영길 장군이다.

울산농고 11회로 육사 11기 졸업생인 손 장군은 누구보다 기대되는 군인으로 화려한 출발을 했지만 1973년 일어난 ‘윤필용사건’으로 불운의 군인이 되고 말았다. ‘윤필용사건’은 사건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중정부장이었던 우석 이후락과 나눈 대화가 문제가 되어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1973년 초 윤 장군이 식사자리에서 평소 형으로 불렀던 우석에게 지나가는 말로 “박 대통령도 이제 연로했으니 다음 후계자는 형님이 되어야지요”라고 한 말이 박 대통령 귀에 들어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윤 장군과 그를 따랐던 하나회 회원들이 쿠데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 때 윤 장군과 그의 참모장이었던 손 장군은 각각 15년 형을 받았다. 우석은 다행히 살아날 수 있었지만 이 때 중정의 이후락 사단 40여명이 옷을 벗었다.

하나회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이 영남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만든 군내 사조직으로 이들에게는 진급과 보직에서 특혜가 주어졌다. 손 장군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회 회원들 중에서도 박 대통령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5·16을 일으켰을 때는 대위 신분으로 박 의장의 부관을 지내 동기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동기생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별을 달았다. 그의 육사 동기로 나중에 그와 라이벌이 되는 전두환은 이 때 경호대에, 노태우는 방첩대에 있어 박 대통령에게 직보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손 장군이 소령 계급으로 30대 대대장을 지낼 때 최종두 시인이 정임석 열사의 비를 건립하기 위해 손 장군을 찾은 적이 있다. 최 시인이 이 때 손 장군을 찾은 것은 비를 세울 부지 확보를 위해서였다. 30대 대대장은 수경사에서도 핵심적인 부서로 대령이 대대장직을 맡게 되는데 손 장군은 소령계급으로 이 자리를 지켰다.

최 시인의 회고다. “제가 손 장군을 만나 비를 세우겠다는 의사를 전했더니 손 장군은 ‘이 문제는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과 의논해야 한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는데 허리에 총을 차고 들어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총을 차고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는 군인이 없었는데 손 장군이 총을 차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손 장군이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손장군이 처음 별을 단 것이 1973년 1월이었는데 2월에는 청와대로 들어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고급차 크라운 4기통을 선물로 받았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노태우와 대구 출신으로 전두환 정권아래서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정호영은 손 장군보다 일 년 뒤 별을 달았다.

이에 앞서 70년 초에는 25사단 75연대장에 취임했다. 이때도 그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취임식장에는 육본 군악대가 동원되었고 군사령관과 군단장, 사단장 심지어 기업체 장까지도 참석했다.

이후 윤필용 사령관 밑에서 참모장을 지낼 때는 윤과 손 라인이 육군참모총장과 차장 라인보다 막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윤필용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영어의 몸이 되었던 그는 출옥 후 한 동안 미국에서 살았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 동기생들이 권좌에 앉을 때 그 역시 미국에서 돌아왔지만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대우에서 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었다.

최근 들어 그의 얼굴이 다시 언론에 비친 것은 ‘윤필용사건’이 무죄로 판명되면서 받은 보상금을 육사에 기증하면서다.

북정동 옛 울산초등학교 가까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던 그는 울산농고에 대한 사랑도 커 최근 개최된 ‘울산공고 80주년 기념식’에도 많은 돈을 희사했다. 그가 수경사에서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우석은 그를 중정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가 군인의 길을 고집해 성사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손 장군이 수경사 참모장으로 있을 때 울산 범서 출신의 이구락 헌병 중령은 수경사에 있으면서도 중정 보안과장 자리를 오가면서 근무했다. 이 중령은 우석의 먼 인척이다.

중정 출신의 울산 인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허용만씨다. 육사 8기로 준장으로 예편했던 그는 용잠 출신으로 어릴 때는 가난해 광산 부자 이종만씨 집에서 기거했다. 서울 명문고를 졸업한 후 육사로 진학했던 그는 예편 후 중정에서 기조실 통제관을 시작으로 총무국장을 지낸 후 서울, 부산·경남 분실장을 지냈다.

재임 중 박만식과 이홍우 등 고향 사람들을 많이 중정에 천거했던 그는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너무 술을 좋아해 일찍 타계했다. 이홍우씨는 손영길 장군의 처 외5촌으로 중정에 들어가지 전에는 용잠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울산농고 6회 출신인 정상만씨도 중정에서 강원지부장을 지내는 등 고위직에 있었다. 울산농고 시절 일본 선생을 미워해 선생의 옷에 잉크를 뿌리고 일본으로 도망쳤던 그는 해방 후 돌아와 사병으로 입대해 육군소장으로 군수기지사령관까지 지냈다.

강원도에서 보병 사단장으로 있을 때는 예하 부대에서 간첩을 많이 잡아 명성을 날리기도 했던 그는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10·26후 전두환 정권아래서 계엄사령관이 된 이희성 장군은 선임자들을 모두 예편시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정 장군에게 통고했다. 이때 정 장군은 바로 계엄사령관 실로 달려가 이희성 사령관의 책상을 뒤엎은 후 “영관급 장교를 예편시킬 때도 사전에 통고를 하는데 아무리 계엄 때라고 하지만 장군을 예편시키면서 이렇게 멋대로 할 수 있느냐”면서 항의했다. 이러자 여론을 의식했던 이 사령관이 전두환 장군과 협의해 국정교과서 사장 자리를 주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김영호씨는 중정에 들어가기 전 시내에서 태화약국을 운영했다. 우석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우석의 청년조직인 ‘청수회’ 회장으로 활동했던 김씨는 중정 의무실에서 근무했다. 김씨가 자비를 들여 청년조직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 기봉씨가 부자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약국을 경영하면서도 울산에서 최초로 발동기가 달린 자전거를 타는 등 여유 있는 생활을 했다. 그의 부친은 태화동 십리대밭에 넓은 대밭을 가졌을 뿐 아니라 명정 마을 일대에 논이 많은 땅 부자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태화저수지를 개축할 때는 거금을 희사했는데 그 때 마을 사람들이 세운 공덕비가 지금도 저수지 제방에 있다.

성안 출신의 오인태씨는 간부후보생으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중정으로 들어가 대령 때까지 근무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울농 10회로 중정에서 5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수사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육사 11기 출신으로 울산출장소장을 지냈던 박영대씨는 육사를 졸업할 때 2~3위를 다투었던 수재로 그의 형이 동강병원 초대 이사장을 지냈던 박영철씨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전두환 장군이 12·12사태를 일으켰을 때 김포 분실장으로 있었던 그는 우석이 이 무렵 신병치료차 김포공항을 빠져 나갈 때 몰래 출국을 시키기도 했다.

허용만 장군과 오인태씨의 신원보증으로 중정에 들어간 이복씨는 공채 출신으로 정보학교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직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이외에도 양정 출신의 이상호 해군 소장과 언양 출신의 김재덕 장군도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있을 때 고위 간부로 활동했다.

이복씨는 “중앙정보부가 대공업무를 담당하다보니 한때는 무리한 수사로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우석 아래에서 일한 직원들 대부분은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차출된 엘리트로 뚜렷한 국가관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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