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울산읍성(蔚山邑城)제7편 - 울산도호부의 관아(하)

▲ 1910년대 가학루와 공사문.

유사상황 알릴 뿔나팔 등 비치한 가학루
1600년대부터 존재…올해 재복원 예정
남이문 밖 관청 장대·염세소 등 존재
울산 행정중심은 중구 일원임을 보여줘
울산의 위상과 격에 부합하도록
울산동헌→울산도호부로 명칭변경 필요

울산읍성 안에는 내동헌인 반학헌 외에 별도로 외동헌(外東軒)이 있었는데, 이는 3칸 규모로 알안당(枾岸堂) 혹은 얼안당(蘖岸堂)이라고 하였다. 1602년 판관 손기양(孫起陽)이 처음 지었고, 1683년 부사 이선원(李善源)이 중창하였으나, 점차 훼손되었다. 그리고 1859년 부사 이충익(李忠翼)이 약간 손보았으나, 결국 소실(消失)되어 1894년 읍지에는 전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알안당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울산도호부사를 겸직하고 있을 시기에 그를 대신하여 울산도호부를 다스린 판관(判官)이 업무를 보던 집무실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경상좌도병영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울산도호부의 격을 갖게 되면서부터 내동헌(반학헌)이 도호부사의 주(主) 집무실이 되고, 외동헌(알안당)은 손님을 맞이하거나 가벼운 업무 등을 처리하는 부(副) 집무실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한편 동헌의 살림채이자 별당에 해당하는 내아(內衙)는 대청 8칸, 방 6칸, 행랑 9칸, 부엌 3칸 등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ㄱ’자 모양의 1채로만 구성되어 있어 살림채로서의 짜임새 있고 내밀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 또한 1981년 조성의 결과이다.

이와 더불어 동헌 일곽의 운영을 위해서는 출입시설이 필요한데 울산동헌의 경우 주 출입문인 공사문(公事門)이 있고, 시간이나 유사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북(鼓)과 뿔나팔(角)을 비치한 고각루(鼓角樓)로서의 가학루(駕鶴樓)가 있다. 가학루처럼 관아 및 성문의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문루를 폐문루(閉門樓)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리고 동헌과 공사문-가학루를 순서대로 배열해 보면, 가장 북쪽에 동헌, 가운데에 공사문, 가장 남쪽에 가학루가 위치하였고, 이들은 각각 북쪽으로 갈수록 서쪽으로 약간씩 밀려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 영남읍지 울산지도의 장대.

공사문은 전체 6칸으로 구성하였다. 서쪽 3칸은 출입문으로 그 중 가운데 1칸은 지붕을 조금 높게 들어 올린 소슬문이고, 문의 동쪽으로 3칸을 붙여 방문자의 헐소(歇所, 휴게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문의 서쪽에는 별도로 4칸의 건물을 만들어 심부름꾼인 사령(使令)들의 입직소(入直所)로 사용하였다.

다음으로 가학루는 언제 처음 만들어지고, 어떻게 변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휴정문집>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1600년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울산부선생안(蔚山府先生案)>과 ‘가학루기(駕鶴樓記)’를 보면, 1843년 훼손이 심하여 중수하기를 논의하였고, 1847년에는 곧 무너질 지경이어서 결국 헐어버리고 이후 10년 남짓 울산동헌은 가학루가 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59년 부사 이충익이 중건한 것이 1930년대 까지 전해졌다. 따라서 현재 전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전후의 사진들은 모두 부사 이충익이 중건한 가학루를 찍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2014년에 가학루 사진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910년대의 것이 발견되었다. 당시 울산박물관의 이선종 학예사와 울산과학대학교의 이철영 교수가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원판 사진을 검토 중 장소미상(場所未詳)의 2층 누각을 발견하고 미리 추정하고 있던 가학루의 모습과 매우 유사함에 주목하여 정밀 검토한 결과, 가학루임을 확신하고 일반에 공개하였다.

이러한 가학루는 일제의 ‘조선 고적·명소·천연물보존령’에 따라 초안을 작성할 때, 울산에서는 유일하게 그 대상으로 오른 적이 있는데, 1935년 최종 150점을 선정할 때는 탈락하여 이후 연혁은 살펴볼 길이 없게 되었고, 가학루는 물론 누마루에 걸어두었던 북[鼓]과 나팔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가학루는 기억에서 멀어진지 80여 년이 지난 2017년 올해에 다시 우리들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북소리도 바람을 타고 동헌을 찾는 이들의 가슴을 두드릴 것이다.

이 외에도 울산동헌 주변에는 그에 딸린 군관청(軍官廳), 양무당(養武堂), 토포청(討捕廳), 도총소(都摠所, 현재 태화서원), 작청(作廳), 형리청(刑吏廳) 등 매우 많은 관청들이 있었다. 이 중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아 주목되는 것으로 울산도호부의 남이문(南里門, 강해루) 밖에 위치하였던 장대(將臺)와 염세소(鹽稅所)가 있다.

장대(將臺)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을 일컫는데, 울산도호부의 장대는 만하관(挽河關) 또는 만하정(挽河亭)으로 불렸으며, 현재의 중구 젊음의 거리 동쪽 끝(중앙시장 입구 사주문)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하(挽河)’는 은하수라는 의미로 당나라 시인 두자미의 ‘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永不用(어찌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서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다시는 사용되지 않도록 할까)’이라는 시구(詩句)에서 따온 것이며, 이는 곧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영(현재 경남 통영)의 만하정(挽河亭)과 세병관(洗兵館)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학성지 울산지도의 염세소.

한편 염세소(鹽稅所)는 태화강 남쪽의 곳곳에 위치하였던 여러 염전(鹽田)에서 생산되는 소금에 부가한 세금(염세)을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학성지>의 울산지도를 분석해보면, 염세소는 태화강과 동천(어련천)이 마주치는 일원(현재의 학성·반구동~내황마을의 강변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염세소 등 여러 관청과 관아가 태화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생산시설이 위치한 여타의 지역을 관장하는 울산도호부의 행정중심은 현재의 중구 일원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것이 곧 현재 울산 중구의 다양한 문화콘텐츠 사업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흔히 언급하는 울산도호부와 그 중심에 위치하였던 관아와 관청의 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는 울산군이 울산도호부로 격상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1437년 잠시(8개월 동안) 울산도호부로 승격되었던 것을 제외하고 나면 임진왜란 이전 울산의 격(格)은 줄곧 ‘군(郡)’이었다. 하지만, 후일 정유재란의 말미인 1599년 5월 15일에 울산군이 울산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매우 뜻 깊고, 특수한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선시대에 한 고을의 격(格)을 결정할 때는 각 고을의 행정·군사·사회적 중요도 및 고을규모 등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울산은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때 울산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의(忠義)정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군(郡)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울산사람이 울산도호부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며, 민관(民官)이 합심(合心) 하여 국난을 극복한 울산의 강인한 정신(太和, 대화합)을 여지없이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울산도호부는 여타 고을의 도호부에 비해 훨씬 값진 격(格)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울산의 도호부사로 부임한 수령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왜란을 극복한 울산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러한 울산도호부의 대표적인 관아가 바로 울산동헌이다. 현재 울산동헌 일곽은 ‘울산동헌 및 내아(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명칭에서 울산 선조들의 충의정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울산도호부의 격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움이 앞선다. ‘울산동헌 및 내아’는 해당 건물 자체의 문화재적 가치에 주목하여 부여한 명칭이므로 근대이전 울산 고을의 격을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울산도호부의 위상과 격에 부합하도록 ‘울산도호부 관아’로 문화재 명칭을 변경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만하다. 동헌 등을 포함한 동헌일곽에 조선시대 고을 이름을 부여하여 문화재 명칭으로 부여한 사례로는 ‘제주목 관아, 영월부 관아, 홍산현 관아, 거제현 관아, 위도관아’ 외에도 다수가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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