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9)우석의 영광과 몰락

▲ 우석 이후락은 중정부장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를 만들며 칩거생활을 하다가 10대 총선에서 당선돼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진은 우석이 한창 도자기 제작에 몰두해 있던 1976년 10월 도자기도화전을 개최하며 지인들에게 보낸 초청장이다.

북방으로 대통령의 신임 얻었으나
측근들의 질시·견제 받는 계기로
‘윤필용 사건’ 계획적이란 시각도

‘김대중 납치사건’후 오랜시간 칩거
10대 총선으로 중앙에 복귀했지만
1979년 박 대통령 서거로 중도하차
5공화국 뒤엔 부정축재자로 수모

권불 10년’이라고 한다. 10년 가는 권력이 없다는 말이다. 우석 이후락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이 1963년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1973년이다.

그동안 부침도 많았다.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주일 대사를 지냈다. 그는 일본에 있으면서도 항상 촉각은 청와대의 박 대통령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중앙정보부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우석의 영광과 몰락에는 미스터리가 많다. 그가 영광의 정점에 섰을 때는 1972년 박 대통령의 밀사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다. 북한으로 갈 때는 당시 김종필 총리도 몰라 그가 김 총리보다 더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석은 권좌에 있는 동안 항상 김 총리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우석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북한까지 가 김일성을 만난 후 ‘7·4공동성명’을 얻어낼 수 있었던 요인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높은 안목과 기지 그리고 담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우석이 일본 대사로 있을 때는 남북 간 정보전이 치열했는데 정보 분석력이 빨랐던 그는 자신이 남북대화의 전면에 나설 경우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고 중정부장이 된 후 이를 실천에 옮겨 성공했다.

우석이 북한으로 갈 때는 두 명의 울산인물이 동행했다. 한 명은 지난 호에 소개했던 이장우 비서실장이고, 다른 한 명은 김정원 중정 경호과장이다. 우석이 김 과장을 중정으로 데리고 간 것은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이었던 김 과장은 중정으로 가기 전 울산경찰서장직에 있었다. 그가 울산경찰서장으로 있었던 때는 1969년 1월부터 1970년 12월까지다. 이 무렵 우석은 박 대통령을 수행 공단의 진척상황을 알기 위해 울산에 자주 왔다. 그 때마다 우석은 김 서장이 대통령 동선을 잘 파악하고 교통통제 등 대통령 경호 업무를 효과적으로 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물론 김 서장은 너무 과도한 경호로 여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69년 5월13일 경향신문은 ‘울산서 4시간 동안 수백 대 차량 발묶여’라는 제목으로 ‘5월9일 박정희 대통령이 울산공단을 방문할 때 김정원 서장이 교통통제를 너무 심하게 하는 바람에 울산으로 진입하는 외곽 차량들이 4시간 동안이나 꼼짝 못했다’는 기사를 써놓고 있다.

우석은 중정부장이 된 후 김 서장을 경호과장으로 특채했다. 이후 북한으로 갈 때 마다 수행원 자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나중에 동경주재관까지 지냈던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 울산 출신 경찰관들의 친목단체인 ‘경우회’ 회장까지 지냈다. 5~6년 전 부산으로 이사해 현재 부산에 살고 있는 그는 울산출신 경찰관들을 부산에서 만나 소주를 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박 대통령의 최 측근으로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우석은 박 대통령의 구미에 맞는 일을 많이 했다. 북한 방문은 그가 남긴 업적 중에서도 박 대통령을 가장 기쁘게 했다.

우석이 북한 방문을 얼마나 자신의 큰 업적으로 생각했나 하는 것은 10대 총선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이 선거에서 자신의 사무실에 평양에서 김일성과 악수하는 사진을 걸어 놓고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남북대화를 위해 청산가리를 갖고 사선을 넘었다고 자랑했다.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우석은 자신의 북한 방문을 자축했다. 그는 말년에는 경기도 이천에 칩거한 뒤 도평요에서 도자기를 굽는 일 외에는 좀처럼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갔다 왔던 매년 5월2일에는 그와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을 광주 집으로 불러 그날을 기념하면서 식사를 했다. 이런 긍지는 우석을 수행해 북한을 갔다 왔던 김정원 서장도 마찬가지였다. 김 서장이 동경주재관으로 있을 때 일본에서 그를 만났던 최종두 시인은 “그때는 이미 그가 우석과 함께 북한을 갔다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스위스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회상했다. 또 4~5년 전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김 서장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던 박문태 울산문화원연합회장도 “김 서장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가 북한을 다녀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남북대화 성공으로 우석은 박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2인자의 위치도 굳혔지만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박 대통령 측근들로부터 질시와 견제를 받았다. 그가 북한을 다녀온 지 불과 일 년 뒤 일어났던 ‘윤필용 사건’은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을 질시한 박 대통령 측근들이 계획적으로 꾸민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후 얼마 있지 않아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은 우석이 ‘윤필용 사건’으로 잃어버린 박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찾기 위해 일으킨 과잉 충성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김대중 납치사건’ 후 우석은 오랫동안 칩거해야 했다. 그가 다시 중앙무대로 돌아온 것은 10대 총선으로 울산에서 당선된 뒤부터다. 그러나 이마저 박 대통령이 1979년 서거하는 바람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5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박 대통령이 서거 직전 우석을 국무총리로 내정했다는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주장은 10·26 당시 우석의 차를 몰았던 김문득씨에 의해 밝혀졌다. 김씨는 10·26 당시 울산MBC 소속으로 정택락 사장의 운전수로 활동했기 때문에 우석이 울산에 오면 항상 정 사장의 차로 우석을 모셨다. 김씨는 10·26이 일어났을 때도 울산에 있던 우석을 차에 태워 밤새도록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까지 모시고 갔다. 김씨에 따르면 우석이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으로부터 국무총리 내정 사실을 전달 받은 날짜가 10·26 사흘 전인 10월23일이었다. 우석은 이날 나주의 한영수, 포항의 권노태 등 나중에 자신과 함께 공화당에 입당한 무소속의원들의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해 이들을 격려해 주고 있었다. 당시 우석은 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들을 규합해 ‘의정동우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석은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가장 먼저 공화당에 입당, 10월15일 개편대회를 마쳤다. 이후 그는 다른 의원들의 개편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월23일 나주 개편대회에 참석해 축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중정의 김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와 수행비서 김종오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 내용은 우석에게 빨리 서울로 오라는 것이었다. 우석은 축사도 않고 갑자기 행사장에서 나와 김씨에게 서울로 빨리 갈 것을 재촉해 3시간 만에 용산 우석 집에 도착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초 우석은 나주 개편대회 후 그 곳에서 하루를 머물 예정이었다고 한다. 우석은 용산자택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수행비서 없이 혼자 궁정동 안가로 갔다. 그리고 40여분 간 김 부장과 대화를 나눈 후 나왔다. 이 때 김씨는 우석이 김 부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접견실에서 궁정동 직원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김 부장이 그날 급하게 우석을 부른 것이 국무총리 내정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귀띔을 해 주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김씨에 따르면 이날 우석은 궁정동 안가에서 용산 집으로 오면서 “서울의 도시계획이 잘 되었다”며 박 대통령을 칭찬하는 소리를 여러 번 하면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김씨는 그러면서 우석이 안가에서 김 부장을 만난 일을 당분간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하명을 내렸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 온 우석은 다음날 서울에 있는 지인들을 용산 집으로 초대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자신이 멀지 않아 다시 중직을 맡을지 모른다는 예고를 했다고 한다.

우석의 국무총리 천거는 본인이 타계할 때까지 밝히지 않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김씨의 주장이 당시 상황과 너무 맞아 떨어져 가볍게 볼 수만은 없다. 당시 박 대통령은 부마사태를 맞아 정국 안정을 위한 시국 수습차원에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이끄는 내각 개편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였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박 대통령이 좀 더 일찍 자신이 ‘꾀보 조조’로 불렀던 우석을 기용했다면 10·26 사태를 피해 갈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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