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대륙의 남서단에 길게 면한 케랄라는 내셔날지오그래픽 트래블러가 선정한 세계 10대 낙원에 포함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알레피(alleppey) 수로 때문이다.

세계10대 낙원으로 꼽힌 알레피 수로여행
섬과 호수 습지 잇는 900㎞의 선상유람
지극히 평범한 나룻배에 편안히 앉아
농촌의 일상적 풍경 무심히 보다보면
어느새 마음엔 자연이 주는 평화 깃들어
하천정비라는 미명아래 꾸미지 않아서
뭇생명들 공존하는 태화강 상류도 낙원

인도에서 기차여행을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모험이다. 혹시 지저분한 남의 침대에서 잠 못 이룰 정도로 깔끔 떠는 사람이라면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침대가 있는 특실이라고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는 애시 당초 버리는 것이 좋다. 여기서 편안하게 숙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상 어디라도 능히 생존할 수 있는 인증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죽음의 레이스와 같은 육상교통을 생각한다면 기차여행은 그나마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교통수단임에 분명하다.

14년 전의 악몽을 기억하며 벵갈로루에서 코친으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기다린다. 그 세월만큼 많은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건만 열차의 외형부터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표면을 망치로 두드린 듯 우그러진 객차가 꼬리를 물고 역으로 들어온다. 30량 이상의 객차에서 내 객실을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 서있으면 500미터 이상 달리기를 해야 한다. 엄청난 짐을 들고 일제히 뜀박질하는 광경은 전쟁 드라마에 가깝다.

비록 6인실이지만 침대칸을 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침대칸은 3단씩 6개 침대가 한 칸이고 통로 쪽으로는 칸막이가 없다. 침대를 모두 펴면 앉아 있을 수가 없으니 2층 이상의 좌석이라면 무조건 누워야 한다. 3층에 있는 침대는 오르내리기도 만만치 않지만 천장 높이 때문에 구부려 앉아 있을 수도 없다.

잠자리를 준비하는데 기본적으로 베개와 모포 1장, 시트 2장의 침구가 제공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 속 편하다. 베갯잇은 땟국물이 졸졸 흐르고, 두 장의 시트는 세탁한 것이지만 원래 흰색이었는지 의심될 만큼 얼룩무늬가 많다. 그나마 모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모를 다양한 생물들이 우글거린다. 도저히 덮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경륜이 있는 여행자라면 시트 한 장은 깔고, 한 장은 덮고 그 위에 모포를 덮는다.

눈 질끈 감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객실 안에서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놀라 일어나 살펴보니 토끼만한 쥐가 객실 안에서 여기저기 산보를 다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체념의 경지에서 해탈의 경지로 들어선다. 자다 깨기를 밥 먹듯이 하며 11시간 반의 고행 끝에 코친에 도착한다.

아수라와 같은 열차여행은 코친의 수로여행에서 극적 반전을 맞는다. 코치 혹은 코친이라고 부르는 이 도시는 남미의 칠레처럼 인도대륙의 남서단에 길게 면한 케랄라 주에 속해 있다. 케랄라는 내셔날지오그래픽 트래블러가 선정한 세계 10대 낙원에 포함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알레피(alleppey) 수로 때문이다. 백 워터(Back water)라고도 불리는 이 수로는 실상 강릉 경포호수와 같은 거대한 석호 안에 조성된 물길을 말한다. 900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수로는 석호 안의 섬과 호수, 습지를 이어주는 강과 운하가 미로처럼 얽혀져 만들어졌다. 그 물길을 따라 선상유람을 즐기는 것이 바로 알레피 수로의 관광이다.

낙원이라 일컫는 수로의 풍경은 결코 화려하거나 경이롭지도 않다. 유럽도시처럼 고풍스럽고 세련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도의 왕궁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풍경도 아니다. 관광을 위해 특별히 만들거나 정비된 흔적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농촌풍경에 불과하다. 하우스 보트라는 유람선마저 야자 잎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토속적인 나룻배의 모습이다. 특별히 주목할 것이 없기에 마음은 한가하고 여유롭다. 안락한 대나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조망하며 남인도의 또 다른 세계로 스며든다.

수로 가에는 열대 야자수들이 아름다운 남국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부레옥잠이 가득한 맑은 물은 모네(Claude Monet)의 ‘수련’처럼 생명력을 뿜는다. 그리 풍족하지 않은 농촌마을의 일상적 정경마저 내 마음의 평화로 스며든다. 무엇하나 꾸민 구석이 없기에 아름답다. 새들과 물풀들과 물고기와 어울려 나도 자연 속의 하나가 된다. 뭇 생명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이곳이야 말로 낙원이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강이 없었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웬만한 향읍치고 강 없는 지역이 드물고, 그 강변 마다 누정이 즐비하며, 누정마다 강변의 아름다운 풍치를 읊은 시문이 차고도 넘친다. 그 강변은 석축과 포장으로 ‘정비’되지도 않았고, 서양정원과 같이 조경된 적도 없었지만 시적 감흥을 유발시킬 만큼 아름다운 장소였다.

절경의 강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자연’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기로는 어느 후진국에도 지지 않을 것이다. 하천정비라는 이름으로 쌓고 메우는 것도 모자라 하천생태계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또 파헤치며 인공의 물길로 정비해왔다. 강변에 살던 뭇 생명들은 쫓겨나고 그 자리에 인간의 놀이터가 조성되었다. 아무리 잘 정비된 강변이라도 자연에 비할 바 있으랴.

이즈음 정비되지 않은 태화강 상류에 나가보라. 심지도 않은 유채가 흐드러지고, 강에는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떼를 이루고, 하늘에는 온갖 물새들이 강을 따라 모여든다. 공생과 조화가 주는 기쁨은 황홀하다. 샨티(Shantih)! 샨티(Shantih)! 시인 엘리어트(T.S. Eliot)가 뱉은 마지막 단어는 고요한 평화이다. 어찌 먼 곳에서 낙원을 찾으리. 그리고 우리는 가상의 매트릭스 세계처럼 화학적으로 정화된 푸른 물과 비까번쩍하게 치장된 강변공원에서 마치 낙원인양 살아가고 있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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