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90)우석의 흔적들

▲ 우석 이후락은 울산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그의 편린은 울산여상과 학성고등학교에만 남아 있어 아쉬움을 준다. 사진은 울산여상 기념관에 있는 우석의 부조(위)와 학성고등학교에서 볼 수 있는 충효탑(아래).

중앙 실세로 있던 시절에는
울산의 많은 인재 등용하고
울산~언양 고속도로 건설 등
고향 울산의 도약 위해 힘써

학교법인 ‘울산육영회’ 설립후
학성고·울산여상 건립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 사업에 열정 쏟아

유신정부의 실세로 비난받지만
울산발전 공로는 두말이 필요없어
일부인사 중심 공덕비 건립 제안도

울산 공업도시 건설에 앞장섰던 우석 이후락은 울산을 가장 발전시켰던 인물이다. 우석의 조카뻘로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 지켜보았던 이복씨는 “우석이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계획했던 유신에 앞장서다보니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난은 받을 수 있지만 그가 역대 울산 정치인 중 가장 울산 발전을 위해 힘썼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석은 공업도시 울산의 건설과 학교 건립에 힘썼다. 중앙 실세로 있을 때는 울산의 많은 인재를 등용했다. 이런 업적에 비해 울산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은 별로 없다.

그는 1924년 2월 웅촌면 석천의 안짝 마을에서 태어났다. 안짝 마을은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의 동편 들판으로 요즘은 인근에 새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있던 1966년 별장 ‘육석정’을 생가에서 300m 정도 떨어진 회야 강변에 건립했다. 이 땅은 원래 그의 6촌 형 축락씨가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농사를 지었던 곳이다. 축락씨는 이복씨의 부친이다. 대지 800여 평, 건평 80여 평의 2층 별장 건물은 당시 우석의 권력에 비하면 검소하게 건립되었다. 1층에는 2개의 거실과 비서실 그리고 2층에도 큰 거실과 우석의 숙소가 강쪽으로 있었을 뿐 다른 시설물은 별로 없었다.

우석이 권좌에 있었던 60~70년대만 해도 ‘육석정’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우석이 별장에 들릴 때 마다 울산MBC 정택락 사장과 최상규 상무, 울산농고 후배인 정상만 2관구 사령관이 문안인사를 한 후 돌아가곤 했다. 이들 외에도 심영찬 웅촌양조장 사장과 김준식 웅촌 면장도 우석이 좋아했던 웅촌 막걸리와 고래고기를 준비했고 때로는 회야강에서 잡은 기름쟁이 매운탕을 식탁에 올려놓고 기다렸다.

그는 이곳에서 안방 정치를 했고 사람들을 만났다. 7대 총선에 나섰던 김성탁 후보의 사퇴서를 받아내고 10·26사태 때 일본 후쿠다 전 수상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도 이 별장에서였다. 후쿠다 수상은 나중에 수상에서 물러난 후 직접 이 별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도 이 별장에 자주 드나들었던 인사 중 한명이다. 당시만 해도 웅촌 면사무소에서 별장으로 오는 길이 포장되지 않아 우석은 물론이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불편이 컸다. 이를 안 정 명예 회장이 우석에게 도로를 포장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여론을 의식한 우석이 단호히 거절했다는 소문이다.

▲ 우석 이후락은 울산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그의 편린은 울산여상과 학성고등학교에만 남아 있어 아쉬움을 준다. 사진은 울산여상 기념관에 있는 우석의 부조(위)와 학성고등학교에서 볼 수 있는 충효탑(아래).

우석은 권력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발길을 끊었는데 그때는 우석의 큰 아들 동진이 관리했다. 이 건물이 남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10여 년 전이다. 소주공단의 한 공장이 별장을 뜯고 이곳에 근로자들을 위한 연수원을 건립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소문으로 그쳤고 최근에는 부산의 한 세무사가 이 집을 구입해 전원주택을 지어 살고 있기 때문에 우석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에는 우석의 편린이 남아 있다. 우석은 60년대 초 ‘학교법인 울산육영회’를 설립한 후 학성고, 울산여상, 언양여상 등을 건립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울산여상 기념관에는 ‘頌德’이라는 제목 속에 이 학교 졸업생들이 우석에 바치는 글이 새겨진 부조가 있다.

‘우리들을 길러주신 인자하신 이사장 이후락 선생님의 높으신 뜻을 받은 우리 700여 본교 졸업생들은 사회의 역군으로 이 나라의 참된 여성이 되었음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사장 이후락 선생님의 만수무강하심을 비나이다. 1970년 6월 1일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 제 1, 2, 3, 4, 5회 졸업생 일동’

학생들이 이 부조를 세웠을 때 우석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부조 아래에는 우석의 약력이 있고 부조 옆에는 우석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아래에는 ‘1972년 11월 4일 평양에서 제2차 남북조절위원장 회의를 마친 후 판문점 자유의 집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우석’이라고 설명해 놓고 있다. 이 글 아래에는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땅에 뿌리박자’는 글귀도 보여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신정동 학성고등학교 ‘충효탑’에도 우석의 흔적이 있다. ‘충효탑’은 학교 정문에서 교정으로 100m 정도 들어가면 왼편에 있다.

3층으로 된 돌탑의 맨 꼭대기에는 우석의 친필로 ‘忠孝’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돌 뒷면에는‘나라에 충성을’ ‘부모에 효도를’ ‘벗에는 우정을 다한다’는 글이 있다. 탑 동서로도 글이 있는데 동편에는 ‘李厚洛 設立者 書’가, 서편에는 ‘西紀 1978년 11월 29일 建立’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이 건립될 무렵 우석은 10대 총선을 앞두고 울산에서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다.

교동 330번지는 우석이 청운의 꿈을 키우고 10대 총선을 치룬 곳이다. 우석은 어린 시절 초등학교만 웅촌에서 마쳤고 울산농고를 다닐 때는 교동 누나 집에서 기거했다. 그가 이 집에서 학교를 다닐 때 매형 윤진하씨는 교사였다. 윤씨 아들 원조는 나중에 울산 MBC 상무가 되고 원조씨 아들 철희씨는 우리나라 유명 음악가로 울산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국민대학 음대 교수로 있다.

우석은 고교시절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울산농고는 실업학교로 학생들에게 영어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집에 기거하는 동안 화장실에 영어 단어 암기장을 붙여 놓고 용변을 볼 때도 단어를 외울 정도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10대 총선 때는 이 집을 사조직 사무실로 이용해 사람들이 들끓어 발붙일 곳이 없었다. 우석은 10대 총선 때 선거사무실을 성남동 동아약국 인근에 두었지만 주로 이곳에서 울산 사람들을 만나고 선거전략을 짰다.

당시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사람이 정택락과 김원규씨였다. 서울에서 우석의 개인 비서로 활동했던 정씨는 이 무렵 울산 MBC 사장 자리에 있으면서 그의 선거를 도왔고 9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씨는 우석이 출마하자 스스로 공천을 포기하고 우석의 선거사무장으로 활동했다.

선거기간동안 체력을 지키기 위해 소양지 머리에 치즈를 듬뿍 넣어 끓인 설렁탕을 우석이 먹은 곳도 이 집이다.

그동안 울산 도심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확장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집은 전혀 변치 않고 옛 모습 그대로다. 단지 주소만 교동 330번지에서 ‘한결 5길 8번지’가 되어 있다.

우석이 울산발전을 위해 얼마나 고심했나 하는 것은 우석이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조흥은행장과 한국축구협회 회장을 지냈던 북정동 출신의 고태진씨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할 때 우석 선생님이 갑자기 저를 불러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선생님이 ‘경부고속도로 추진 상황을 보니 고속도로가 언양 방면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울산의 공장들이 물류 수송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면서 저에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양과 울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따로 건설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자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바로 건설부 장관을 불러 울산~언양 고속도로를 건설하라고 지시 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우석 선생님이 울산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실제로 울산~언양 고속도로는 당초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우석의 주선으로 한신부동산이 서울신탁자금의 출자금으로 도로 공사를 시작해 경부고속도로 개설 10일 후인 1969년 12월 29일 따로 개설했다.

최근 울산 인사들을 중심으로 우석의 울산 사랑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일부 인사들은 태화루를 건립할 때 이곳에 우석의 공덕비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어 놓기도 했지만 아직 지지부진이다.

도시발전을 개발의 가치로만 생각할 수 없지만 우석은 울산의 하늘과 땅 그리고 무엇보다 울산 사람을 사랑했다. 그의 공덕비 건립을 놓고 찬반양론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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