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대상 묻지마 범죄 공분 확산
일상화된 폭력 사회적 대책 시급

▲ 안미수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정책연구팀장

초등학생 때 집에 밤손님이 든 적이 있다. 잠에서 깬 내 눈 바로 앞에서 흉기를 든 도둑이 엎드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도둑이야!’를 외쳐야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후환이 두려워 도둑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알고보니 도둑이 들고 있었던 것은 작고 무딘 우리 집 미용 가위였다. 공포로 입은 얼어붙었고 감각은 마비돼 도둑이 손에 든 것을 무서운 흉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에도 고등학교 선생님의 음흉한 눈빛, 만원버스에서의 음흉한 손놀림 뿐 아니라 혼자 집 앞 골목을 걸어가고 있을 때 만난 ‘바바리맨’ 앞에서도 고함지르기는커녕 그냥 그 자리를 피하는 데 급급했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생각해보라. 물론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그에 대한 대처 방식도 차이가 있겠지만 일상적인 장소에서 마주치는 공포 또는 불쾌한 상황이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한 번씩 경험해봤을 법하다. 이렇게 일상화된 공포와 폭력 속에 살아가다 보면 조금은 무뎌질 만도 한데, 혼자 걷는 골목, 단 둘만 있는 좁은 엘리베이터, 유동인구가 적은 공중 화장실, 고개 돌릴 틈도 없는 만원 버스 등에서는 아직도 긴장된다.

이렇듯 거리, 엘리베이터, 공중 화장실, 버스나 지하철 등 너무나 일상적인 생활 공간 곳곳에서 대면해야 했던 폭력과 차별은 누군가의 특수한 경험이 아닌 누구나의 경험이다.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경험한 공포나 불쾌함을 개인적으로 해결해왔다. 그러나 일명 ‘강남역 살인사건’ 즉 2016년 5월17일 강남역 앞 노래방 화장실에서 모르는 이에 의해 발생한 여성 살해 사건 후 이러한 일상적인 공포는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사건은 밤 늦은 시간에 술을 마신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된 상황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냈으며, 그동안 일부 사이트에서만 보이던 ‘여성혐오’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묻지마 범죄’라고도 했고, 가해자의 정신질환병력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나아가 심각한 성적 불평등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사회적 각성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강남역 10번 출구는 개인적으로는 일면식도 없을 피해자를 기리는 수만 장의 포스트잇으로 도배됐다. 이 76㎜짜리 메모지는 개인 추모자들의 애도와 공감을 드러내는 최소한의 공간이자 사회적인 추모의사를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이 됐다. 또 이러한 추모 분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특히 1자녀 또는 2자녀 중 귀하게 자라 성차별이라고는 경험하지 못했을 거라고 예상되었던 20~30대 여성들이 자신들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지 않아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라며 타인이 경험한 성차별과 성적 폭력 피해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답은 많은 여성들이 일상의 순간 순간 속에서 차별과 폭력의 공포를 경험했기에 나오는 반응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많은 포스트잇에 나타난 수많은 공감과 감정이입은 가해자의 정신질환 유무를 논하기보다는 개인이 경험하는 일상화된 폭력에 대한 사회적 해결 노력을 요구하는 집약적 의사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인지적 오류(Cognitive distortions) 중 하나가 여성의 지위는 이미 많이 향상되었으므로 더 이상 양성평등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했던, 원하지 않는 치근거리는 손짓과 눈빛 등이 ‘서울대 교수 성희롱사건’으로 인해 ‘성희롱’이라는 용어로 공론화되고 사회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했듯이 이 추모의 메모지들이 남긴 메시지를 해석,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안미수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정책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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