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태화강 선바위
(전)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금강산 해금강 봉우리 옮겨 놓은듯
풍광·절경 보러 시인묵객 즐겨찾아
강 건너편 정자, 용암정이 그 증거

13년간 울산 12경으로 불려오다
2016년 지정에서 소리없이 빠져버려
십리대숲의 비경 시작됨 기억해야

울산은 산업도시였다. 그리고 현재도 변함없이 산업도시요, 산업수도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울산을 이야기할 때, 산업뿐만 아니라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얘깃거리가 점점 풍성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풍성함 가운데 한 가지, 이것을 빠트리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태화강(太和江)이야기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 스토리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인 ‘반전’의 이야기구조가 덧붙여지면 이야기는 ‘금상첨화’가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 태화강이야기는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강에서 생태와 환경이 새롭게 부활한 강으로, 썩어가던 강에서 무수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강으로의 반전이 태화강의 이야기를 완성했고, 사람들을 이 태화강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그 태화강이야기의 중심에 울산 12경 가운데 하나인 <태화강대공원과 십리대숲>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시민의 절대적인 휴식처요, 외지에서 울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탐방코스가 된 태화강 십리대숲이지만, 한 때는 하천을 관리하는 건설교통부가 물 흐름에 방해가 된다하여 태화강 대숲의 대나무를 모두 베어내 버리려했다는 끔찍한 얘기 앞에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대숲이 홍수 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는 하천에 나무를 심는 것을 권장한다’며 올린, 이석수 울산과학대 교수의 보고서 한 장이 오늘날 태화강 십리대숲을 있게 하고 울산의 12경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2016년에 울산 12경을 새롭게 지정하면서 2002년도에 12경을 지정할 때와 명칭에 약간의 변경이 생겼다. 지금은 ‘태화강대공원과 십리대숲’이나, 2002년 지정 당시부터 2015년까지는 ‘태화강 선바위와 십리대밭’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 선바위의 다양한 풍경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선바위는 울산관광 전국사진공모전 출품작의 주제로도 자주 활용됐다.

오늘은 울산 12경으로서 그동안 13년의 세월을 지켜오다가 2016년 지정에서 소리 없이 빠져버린 그 ‘선바위’를 찾아 나섰다.

태화강대공원에서 하류 쪽을 바라보면 우뚝 선 태화루가 당당하게 서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상류 쪽으로 향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곧 삼호교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한참이나 올라가다보면 구영교가 나타나고 그 다리를 지나면 태화강 푸른 물 가운데 높이 33.2m, 수면 위 둘레 46.3m, 최정상 폭 2.9m에 이르는 깎아 세운 듯한 기암괴석이 물 가장자리 쪽으로 마치 대장부의 풍채를 닮은 듯한 웅장한 자태를 하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서있는 바위, 바로 선바위(立巖)다.

바위의 꼭대기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선바위는 금강산 해금강의 한 봉우리를 옮겨놓은 듯 하다하여, 예로부터 이 투박함과 단순함이 보여주는 풍광과 절경을 보러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일찍이 울산부사를 지낸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은 이곳을 찾아 한시(漢詩)를 남겼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선바위(立巖)
石老鴻荒後 태고 이후에 바위는 늙고
江流元氣中 원기 속에서 강물은 흐르네.
孤高百丈立 백 길 높이로 서서 홀로 고결한데
突兀半天空 허공 한가운데에 우뚝하네.
却衝波力 부딪치는 물결의 힘을 물리치고 막으니
應同砥柱功 아마 지주의 공덕과 같으리.
仰瞻多感發 우러러보노라면 느낌이 많은데
千古烈夫風 천년이 지나도 열렬한 장부의 풍 채와 모습이네.

한편 이 바위에는 예부터 전해오는 설화가 있어 바위를 완상하는 즐거움과 함께 듣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어느 옛날 공양미를 동냥하러 다니는 행각승이 어느 하루 이 마을을 지나다가 그만 예쁜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강물에 의해 떠내려 오던 ‘번쩍 선’ 큰 바위가 그 처녀를 덮치려하자 이 행각승은 순간 그 처녀를 구하려고 온몸을 던져 바위를 막았으나, 결국 승려는 그 처녀와 함께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승려의 정성과 희생이 갸륵했든지 행각승과 처녀를 덮친 그 바위는 그 자리에 일어서고 말았고, 그 후 지금까지 이 자리에 선채 그날의 비극에 대해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뗀 채 무심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위 꼭대기를 쳐다보니 삼봉(三峰)에 바위를 뚫고 돋아난 낙락목들이 오늘따라 애처로워 보이는 건 아마도 이 선바위에 얽힌 전설 탓이리라.

또한 이 바위가 서 있는 물을 가리켜 ‘백룡담’이라 일컫는데, 이곳에는 아주 오래전에 백룡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터라 날이 가물어 천지가 타오를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 가뭄을 해갈시켜 주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부근의 지질과 암층을 이 선바위와 비교해보았을 때 주변 지질과는 전혀 다른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또한 신기하고 경이로운 이야기이다.

선바위 뒤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선다. 오월인데도 복날 더위 못지않은 날이다. 함께 따라나선 이들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힐 즈음, 장쾌한 암봉(巖峰)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가려 강 건너편에서는 보일락 말락 한 모습으로 서있던 정자 하나가 그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나지막한 높이에 용암정(龍巖亭)이라 이름 새긴 편액이 걸려있다. 1796년 울산부사 이정인(李廷仁)이 선바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입암정(立巖亭)이라는 정자를 이곳에 지었는데, 그 후 허물어진 것을 1940년에 후손들이 재건하여 용암정(龍巖亭)이라 했다고 한다. 이정인은 이 곳에 정자를 지으며, 선바위와 정자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러 물들이 넓게 흘러 밤낮으로 부딪치는데 무한의 시간이 지났어도 그 형상이 무너지지 않고, 풍상을 실컷 겪었어도 그 자태가 변하지 않으니, 늠름하기는 무너지는 물결 속에 버티고 있는 바위산과 같고 엄연하기는 용감히 물러나는 고상한 사람과 같다. 마치 하늘을 뛰어넘어 범할 수 없는 기상 있는 장수와 같으니 이것에 취해서 정자를 지은 것이다.’

▲ 홍중표 자유기고가

용암정을 빠져나와 백룡담을 건너 주차장으로 왔다. 조성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넓고 쾌적하다. 주차장 앞으로는 송림의 그림자가 시원스럽다. 태화강대공원이 널리 알려진 까닭에 고요함이 부족하다면 이 곳은 조용하고 한적해서 유유자적의 물아일체를 느끼고 싶은 분들과, 돗자리라도 하나 깔고 가족들과 소중한 대화의 시간을 갖고 싶은 분들과, 그리고 자연이 주는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분들에게 꼭 권해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 선바위 근방에는 얼마 전에 문을 연<태화강 생태관>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돗자리를 챙겨 돌아가시는 길에 이 곳 또한 꼭 한 번 방문해 보는 것도 큰 수확이 될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울산 12경 가운데 선바위가 얼른 보이지는 않지만 선바위는 여전히 이곳에서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태화강 십리대숲의 진정한 비경(秘境)은 삼호교(三呼橋)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태화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선바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때마침 선바위 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이른 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수면양풍(水面凉風)이다.

홍중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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