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92) 고원준과 열린우리당

▲ 17대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고태진씨가 노 대통령의 부산 상고 선배라는 학연을 앞세워 그의 아들 고원준 의원에게 열린우리당을 도와 줄 것을 부탁했고 고 의원이 이를 받아들여 열린우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부산 당감동에 있는 ‘부산상고 역사관’에는 고태진씨가 쓴 ‘感慨無量’의 휘호가 지금도 걸려 있다.

전두환 정권 주도한 11대 총선때
정치에 입문한 고원준 국회의원
여당 민정당서 참신한 인물로 꼽혀

공천서 탈락한뒤 재계서 활동
2004년 구속직전 열린우리당행
강길부의원 당선시켜 주위 놀라게해
선전 결과에도 곧바로 구속·잠적했다가
병보석으로 치료받다 69세로 사망

울산 정치인 중 고원준 국회의원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도 드물다. 고 의원이 정치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것이 11대 총선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11대 총선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이 무너지고 ‘서울의 봄’을 빼앗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주도했다. 이들은 구 정치인들을 대부분 부패 인물로 보고 이들의 발을 묶어 놓은 채 총선을 벌여 승리했다.

울산의 선두주자였던 이후락과 최형우 의원이 정쟁법으로 묶여 꼼짝할 수 없었던 때가 이 선거였다. 대신 전 정권이 만든 여당인 민정당에서 울산의 참신한 인물로 내 세운 인물이 고 의원이었다. 당시 고 의원은 정치 경력은 없었지만 선거에 필요한 가문과 재력, 인물을 모두 갖춘 유망주였다.

해방 전후 울산에서 양조장을 운영해 엄청난 부자가 되었던 고기업씨가 그의 조부였고 박정희 정권 때 조흥은행장과 한국축구협회회장을 지내면서 중앙의 실세였던 이후락씨와 호형호제했던 고태진씨가 그의 부친이었다.

인맥도 튼튼해 박 대통령 시절 총무처 장관을 지냈던 서일교 장관이 그의 고모부였고 검찰총장을 지냈던 오탁근씨도 인척이었다.

70년대까지 청년회의소 운동을 열심히 해 주위에 그를 지지하는 청년들도 많았다. 34세 때 이미 경남청년회의소 회장과 한국 JC 부회장직에 오를 정도로 JC활동도 활발히 했다.

그에게 처음 정치를 권한 사람은 민정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권정달씨였다. 그가 선거 출마를 종용받을 때만 해도 군사정권의 시녀 역할을 했던 민정당을 탐탐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권씨의 권유를 받아들여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시작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친화력이 있었던 그는 활발한 의정활동을 했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11대 국회에서 곽정출 의원과 함께 인기 있는 주당의 한명으로 알려졌다.

국회의 마당발로 알려졌던 그는 술값도 잘 내어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12대 총선에서는 공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 무렵 그를 지지했던 울산 당원들이 중앙당을 상대로 엄청난 항의를 했지만 민정당은 그 대신 김태호씨를 공천해 당선시켰다.

이후 그는 석유화학지원공단을 위해 1979년 설립된 한주 사장으로 있으면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 1995년에는 민선 울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1997년에는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에 당선되어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가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2004년 검찰에 구속되면서다. 구속 직전 그는 노무현 정권이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영남공동선거대책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선거에서 그는 송철호, 이두철과 힘을 합해 강길부씨를 열린우리당 울주군 후보로 내세워 당선시켰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후 바로 구속되었고 재판 중 잠적해 세인들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잠적 6년 뒤에는 갑자기 일본에서 귀국의사를 밝힌 후 국내로 와 대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병보석으로 울산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미스터리는 아직 남아있다. 그가 어떻게 병보석 중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일본으로 갈 수 있었나 하는 것과 17대 총선에서 왜 열린우리당 선거운동원이 되었나 하는 것은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일본 생활도 타계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아 아직 아는 사람이 없다. 잠적하면서 그가 고규정 담당 판사에게 붙인 편지의 발신지가 원주였다. 따라서 경찰이 원주에 있는 치악산을 모두 뒤졌다. 가족들과 울산의 지인들도 치악산 일대에 전단지를 붙이는 등 수소문을 했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고 의원의 편지를 받았던 고 판사는 창원에서 수석 부장 판사를 지낸 후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그에게 열린우리당 참여를 권유한 인물은 노무현 대통령 최측근이었던 신상우 전 국회 부의장이었다. 신 전 부의장은 17대 대선에서 부산상고 후배였던 노무현 후보를 도와 노 정권 때는 평통수석부의장을 지내는 등 실세로 활약했다.

신 전 부의장의 계보로 오랫동안 울산에서 야당 활동을 했던 김석근(74)씨의 얘기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신 부의장이 저에게 ‘고 의원을 열린우리당에 입당시켜 선거 운동을 같이 하고 싶다’면서 고 의원의 의사를 타진해 보라고 했습니다. 신 부의장은 고 의원과 함께 11대 국회에서 의정활동을 같이해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열린우리당이 울산에서는 인기가 없어 고 고의원이 거절을 할 것 같아 고민하다가 나중에 얘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물러서지 않고 여러 번 만나 울산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한 신항만 사업과 국립대학 설립을 여당 차원에서 추진할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 고 의원이 나서 울산에서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면 이런 역할이 주어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얼마 있지 않아 고 의원이 마음이 변했던지 ‘일단 신 전 부의장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조선호텔에서 나와 함께 고 의원이 신 전 부의장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신 전 부의장은 고 의원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상고 출신인데 고 의원의 부친도 부산상고 출신이 아니냐’면서 ‘우리 모두 열심히 노 대통령을 도와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학연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는 신 전 부의장이 호텔에서 바로 청와대로 전화를 건 후 고 의원을 데리고 청와대로 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의원의 부친 태진씨는 부산 상고 26회 졸업생으로 ‘부산상고 역사관’에는 지금도 고씨를 비롯한 동창들이 졸업 50주년을 맞아 1989년 3월 모교를 방문 한 후 남긴 휘호가 벽에 걸려 있다. 고씨는 이날 ‘感慨無量’(감개무량)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신 부의장과 함께 청와대로 갔던 고 의원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노 대통령은 “제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을 때 고 의원의 부친께서 당선축하 환영회를 성대하게 개최해 주었는데도 부친이 돌아갔을 때 조문을 못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이 날 고 의원은 자신이 나서 17대 총선에서 최소한 두 명의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울산에서 당선시키겠다는 약속과 함께 노 대통령이 공약사업을 지켜 줄 것을 당부했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부산에는 신상우, 경남에는 김혁규, 울산에는 고원준씨 등 3명을 열린우리당 공동선거대책 위원장으로 임명, 영남벨트를 구성한 후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고 의원은 울산에 온 후 후보자 공천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는 많은 울산 정치인들을 만났지만 모두가 열린우리당 입당을 거절했다. 심지어 울주군의 강길부 의원만 해도 서울 분당에 있던 그의 집을 3번이나 찾아갔지만 계속 출마를 거부하는 바람에 후보자 등록 마지막 날에야 겨우 등록시켰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선거 결과 열린우리당은 부산과 김해, 울산에서 각 1명씩 밖에 당선시키지 못해 참패했다. 그러나 후보자 선정에서 극심한 인물난에 시달렸던 울산의 경우 강길부 후보의 당선은 선전이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에서 열린 당선자 대회에서 강 의원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강 의원을 향해 “울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가 금배지를 달았다는 것은 다이아몬드이상의 값진 선물”이라면서 주위 장관들에게 “앞으로 강 의원이 벌이는 지역사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갖고 도와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런 극찬이 있은 며칠 뒤 고 의원은 구속되었고 이후 재판과 잠적 그리고 병보석으로 고생하다가 2013년 향년 69세로 영욕의 세월을 접었다. 현재 울산대공원에 있는 그의 산소에는 평소 그와 가까이했던 고향 후배들이 세운 추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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