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울산왜성(蔚山倭城) 제1편 - 왜성(倭城)에서 공원(公園)으로

▲ 계변성(학성)에서 본 울산왜성(1910년대).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거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재침 명령에 따라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던 1597년에 울산왜성이 축조되었다. 왜군은 당시 조선 남동부 연안의 진출기지였던 서생포왜성에서 경주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전선 보루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1597년 10월 도요토미는 태화강에 면한 도산(島山, 현재의 학성공원)에 새롭게 성을 쌓을 것을 명령하였다.

왜군, 도산의 중요성 간파
동해와 연접해 경주 침략에 용이
유사시 바다로 쉽게 후퇴도 가능

정유재란때서야 축성 이유
임진왜란, 곳곳 승리 공격적 태도
정유재란, 의병 남하 수비적 입장

정유재란 이후 울산왜성은
조선수군이 항구시설로 이용하다
일제강점기 울산성지보존회 설립
1928년 공원 조성·울산공원 명명

울산의 도산(島山)은 태화강 하구의 동천[東川, 일명 어련천(語連川)]과 만나는 합수부(合水部)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북쪽의 신두산(神頭山, 현재 학성산)과 이어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물이 들어차는 경우가 많아 섬(島)처럼 보인다고 하여 도산이라고 이름 하였다. 즉 2개의 강을 끼고 있는 동시에 그 동쪽으로 동해(東海)와 연접해 있는 도산은 경주와 언양 방면으로 침략이 용이한 거점이 되는 것은 물론 유사시에 가까운 바다로 쉽게 후퇴할 수 있는 등 왜군의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유용한 곳이었다.

따라서 왜군은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병영성과 울산읍성을 침략하면서 도산의 장소적 중요성을 간파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선조실록> 41권, 선조26년(1593) 기록에서 임진왜란 당시 울산읍성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고, <제월당실기>(霽月堂實紀)에도 당시 경상좌도병영성(현재 울산 병영성)이 왜군에 의해 점령당했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염두에 두면, 태화강을 끼고 있는 울산읍성과 동천을 끼고 있는 병영성의 가운데에 위치한 도산 일원에 왜군이 상륙하여 양방향으로 침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왜성의 서쪽 국도변에서 본 울산왜성(1910년대).

하지만 왜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산에 왜 성을 쌓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임하는 왜군의 입장이 각각 달랐음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임진왜란 초기의 왜군은 조선에 상륙하여 곳곳에서 승리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진격하였다. 따라서 상륙거점으로 삼기위해 조선 동남해안의 주요 장소에 쌓은 성(城) 외에 추가로 쌓을 이유가 크게 없었다. 이렇듯 당시 왜군은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는데, 울산 지역에서는 서생포에 쌓은 왜성이 거점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조명연합군과 의병의 반격 등으로 점차 남하(南下)하여 남동해안 인근에 머물며 북상을 노리던 왜군은 이전에 비해 수비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바로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의 일이며, 임진왜란 때 눈여겨보았던 울산의 도산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이러한 울산왜성의 축조에는 임진왜란기(1593년)에 서생포왜성을 쌓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비롯하여 여러 왜장들이 참여하였다. 입지 선정과 전체 설계는 가토가 담당하였고, 축성공사는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부장인 시시도 모토츠구(肉戶元續), 기요마사의 부장 가토 키요베에(加藤淸兵衛) 등이 수행하였다. 그리고 감찰관으로 파견되었던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는 입지 선정에서부터 공사까지 전 공정의 감독을 맡았다.

이처럼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왜성의 축조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마치 울산왜성은 그 주인이 가토 기요마사인 것으로 알려지거나 또 그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실제 성주(城主)는 아사노 요시나가였다. 그렇다면, 가토는 아사노의 성이었던 울산왜성의 축성에 왜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이러한 오해를 낳게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아사노의 출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사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처조카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음은 물론 도요토미와 가토는 서로 같은 나고야(名古屋)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토는 더더욱 아사노의 울산왜성 축조에 팔을 걷어 부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울산왜성은 1597년 11월 초순부터 실제로 공사를 시작하여 12월 하순경에는 성의 대부분을 완성하였다. 동원된 인원은 왜군과 잡역부를 합하여 2만3000명 정도이며, 축성재료는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돌을 헐어다가 재사용하였다. 대체로 왜군은 자신들이 주둔할 성을 새롭게 만들면서 인근에 있는 우리나라 성을 허문 뒤 그 성돌로 축성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는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조선군의 반격기지를 없애는 일거양득의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성곽구조가 전술과 전법(戰法)이 다른 왜군들에게 잘 맞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1597년 12월23일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13일간 조명연합군과 왜군 간에 피비린내 나는 제1차 울산성(울산왜성)전투가 벌어졌고, 1598년 9월21일부터 10월6일까지 16일간 제2차 울산성전투가 있었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모든 군대의 철수명령이 떨어짐에 따라 11월 초순경 울산왜성의 왜군도 돌아갔으며, 이로써 울산왜성에서의 대혈전과 약 1년간에 걸친 왜군의 주둔이 끝났다. 이후 경상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울산사람들이 왜적 토벌의 공이 가장 많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이를 계기로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임명하였다.

정유재란 이후 울산왜성은 한동안 조선 수군에 의해 선착장 등의 항구시설로 사용되었다. 인조 2년(1624) 갑자년(甲子年)에 전선(戰船)을 새로 설치하여 울산의 동쪽 도산 아래에 머물러 정박케 했다는 <학성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왜군이 만든 선착장과 성곽 일부를 울산도호부의 수군 기지로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효종 5년(1654) 갑오년(甲午年)에 부의 남쪽 개운포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음으로 볼 때, 그 사용기간은 불과 30년 남짓이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왜성 보존을 위해 울산군내의 조선인과 일본인 유지들로 조직된 ‘울산성지보존회(蔚山城址保存會)’가 설립되었으며, 초대회장으로 추전(秋田) 김홍조(金弘祚)가 선출되었다. 1927년 2월에 울산군수이자 2대 울산성지보존회 회장인 손영목(孫永穆)의 권유에 따라 김홍조의 아들 김택천(金澤天)은 부지 4000여평, 수목 1만1000본을 울산면에 기부하였다. 이후 1927년 4월22일부로 공원설치 인가가 내려졌으며, 공원조성 공사가 9월 16일부터 공사비용 5700여 원에 부산의 정원사 스사키 젠타로(須崎善太郞)의 감독으로 진행되어 1928년 4월15일에 1만5000여 평의 광대한 공원이 완성되었고, 공원의 이름은 ‘울산공원(蔚山公園)’으로 명명하였다.

울산왜성을 공원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현창하는 사업은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의 제정에 따라 1935년에 국내 왜성 중 부산 자성대왜성과 함께 가장 먼저 ‘울산학성(蔚山鶴城)’의 명칭으로 고적 22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울산왜성이 학성(鶴城)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만5000여 평이었던 공원부지는 고적으로 지정되면서 2만2255평으로 확대되었다. 울산왜성은 광복 후인 1963년에 국가 사적 제9호로 재지정되었으나 1996년에 국가 사적에서 해제된 뒤 1997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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