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93)이규정 의원과 이주환

▲ 11·15대 총선에서 당선됐던 이규정 전 의원은 2014년 자동차 사고 후 경주 산내면으로 이사, 우리민족 전통의술의 세계화를 위한 휴양관광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은 산내면 약선 새마을에 있는 이 전 의원의 집.

자금·조직 열세 넘은 젊은패기
‘공천탈락·10대 출마’ 정치경력으로
11대 총선서 농민당 창당, 전격 당선
부친 눈물유세·당숙의 지원유세 주효

15대 총선, 여-야 가교역할
15대 총선서 통합민주당으로 금배지
15대 대구달성 보선 박근혜 출마 설득
16대 대선때 노무현-정몽준 경선 주도

2014년 자동차 사고후 농원생활
당숙 이주환씨 운영하는 농원에 정착
애국정신 심고 전통인술 세계화 노력
‘약선새마을운동’추진 귀농모델 기대

11대울산총선에서 금메달을 땄던 인물은 여당도 제1야당도 아닌 민주농민당의 이규정 후보였다.

민주농민당은 이 후보가 선거 출마를 위해 급하게 만든 당으로 이 후보가 당 총재 겸 전국 유일의 후보였다. 고원준과 심완구 후보에 비해 자금과 조직에서 열세였던 그가 당선 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패기 때문이었다.

고려대 정외과 출신으로 언변이 뛰어나 대학 시절 웅변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여러 번 받았던 이 후보는 대학 졸업 후 7대 총선에서 공화당 공천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당시 그의 나이 26살로 공화당 최연소 공천신청자였다.

이후 십자성 부대 장병으로 월남에 갔던 그는 제대 후 다시 9대 총선에서 공화당 공천을 노렸지만 김원규 후보에게 패했다.

이후락씨가 출마한 10대 총선에서는 아예 여당 공천이 자신에게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또 다시 낙선했다. 그러나 이후락을 상대로 ‘거함 HR을 격침하라’는 구호를 만들고 10대 총선을 최형우와 HR이 사전에 1, 2위를 정해 놓고 벌이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식 선거’라고 비난해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치 경력이라고는 공천 탈락과 10대 출마가 전부인 그가 11대 총선에서 내어 놓은 전략이 동정표였다. 당시만 해도 울산은 아직 시골을 벗어나지 못해 동정표가 후보자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특히 부친 이진환씨가 선거유세에서 보인 낙루가 큰 도움이 되었다. 선거 전까지 구영리초등학교 교감으로 있었던 그는 이 후보가 선거유세에 들어가자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아들의 유세를 도왔다.

이씨는 아들의 찬조 연설에서 “내가 교장이 되고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교육자로 평생을 보낸 나의 소원이었다”면서 “내가 교장이 되는 것은 이미 교직을 떠나 힘들지만 나의 아들을 여러분들이 당선시켜 이 애비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이 때 부친은 동정표를 얻기 위해 퇴직금을 선거비용으로 썼고 선거사무실도 따로 마련하지 않고 도심에 천막을 쳐 놓고 선거운동을 폈다.

선거운도 따라 9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원규씨 표도 대부분 이 후보 쪽으로 왔다. 10대 총선에서 이후락씨의 출마로 현역의원이면서 출마를 접어야 했던 김씨는 11대 총선을 노리고 선거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김씨를 이후락씨의 추종자로 보고 11대 총선 때는 그를 부산 보안대로 불러 불출마 선언을 지시했다. 이러자 그때까지 김씨를 밀었던 울산의 유권자들이 이 후보를 지지했다.

11대 총선에서 이 후보 득표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이 후보의 당숙 이주환(73)씨였다. 당시 이씨는 야음동에서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체육관 단원들이 모두 이씨의 선거운동원이 되어 열심히 선거 운동을 벌여 이 후보에게 몰표를 몰아주었다.

실제로 개표를 해 보니 체육관 인근에 있었던 야음 1·2동과 여천, 장생포, 매암, 부곡, 선암동에서는 고원준, 심완구, 권기술, 고찬수, 강봉학 등 다른 5명의 후보 표를 모두 합해도 이 후보 표보다 적었다.

이 후보가 선거에 나설 때마다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던 이씨는 “영천 이씨 문중에서 돈이 없다보니 조카를 재정적으로 크게 돕지는 못했지만 서울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후 패기에 차 있던 조카는 당시만 해도 우리 문중의 자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처럼 주위 도움으로 어렵게 등극했던 이 후보는 현실정치에 적응하지 못해 이후 여러 번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12대 총선 때는 울산이 공업도시로 바뀐 것을 의식해 당 이름도 민주농민당에서 근로농민당으로 바꾸어 출마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실패했다.

13대 때는 지역구를 서울 양천구로 옮겨 울산 시민들을 또 한 번 당황케 했다. 그가 다시 금배지를 단 것은 15대 총선 때다. 이 때 울산 남구가 갑을로 나누어지면서 을구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신한국당의 차화준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영호남 지역감정이 격심했던 시절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썼던 이 후보는 우리 정치의 고비 때마다 큰 역할을 했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노무현과 정몽준 의원이 당내 경선을 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이 후보였고 15대 달성보궐 선거에서 박근혜를 신한국당 후보로 추천한 인물도 이 후보였다.

16대 대선 때는 야당인 신한국당이 일찍 이회창씨를 대선 후보로 내어 놓았지만 민주당은 마땅한 인물이 없어 고심했다. 이 때 민주당이 내어 놓은 전략이 노무현과 정몽준 의원을 대선 후보로 내어 놓고 경선을 시켜 당 분위기를 띠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기만 해도 정 의원이 경선에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 때 이 후보가 정 의원을 설득해 경선이 이루어졌다. 경선에서는 노무현 의원이 가까스로 승리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경선에서 승리한 후 노무현 의원이 서울에서 울산까지 와 가장 먼저 찾은 인물이 이 후보였다. 노 의원은 이 때 “제가 정치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형으로 모신 분이 김원기 의원 한명 뿐인데 앞으로 이 선배를 두번째 형으로 모시겠다”면서 고마워했다. 그러나 이 후보는 이후 있었던 총선에서 정몽준 의원이 만든 ‘국민 통합 21’로 가는 바람에 노 의원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형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야인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에 앞서 15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던 이 후보는 당 사무총장으로 여당인 신한국당과 제일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가교 역할을 했다. 민자당과 합당 후 이회창 대표가 달성 보궐 선거 후보 선정을 놓고 고민하자 그는 박근혜를 추천했다.

그러나 이 후보의 말을 들은 이회창 대표는 “지금까지 수도원의 수녀처럼 마음을 비우고 살아온 박근혜가 보궐 선거에 나설 리가 없다” 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 대표와 함께 이 후보가 박근혜를 설득시켰고 보궐 선거에서는 박근혜가 국민회의의 엄삼탁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청문회에서 ‘모르쇠’라는 신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도 이 후보였다. 김영삼 정권 때 한보사건 비리와 관련 청문회에 참석해 질의를 벌였던 이 후보는 정태수 회장이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열지 않자 정 회장에게 ‘모르쇠’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95년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될 때는 국회 내무위 소위원으로 울산광역시 승격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광역시 승격에도 온힘을 기울였다.

이후 16대 총선에서도 여의도 문을 두드렸으나 실패했고 한 때는 민주당 울산시장 후보로 시장 선거에 나서기도 했지만 차점에 그치고 말았다.

2014년 4월 말 집 앞 건널목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 때 그는 중상을 입어 울산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6개월 동안 입원했다. 이후 범서의 생가를 처분했던 그는 당시 이주환 당숙이 운영하는 경주시 산내면의 국민관광농원으로 들어가 이곳에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범서읍에서 산내면으로 이사를 갈 때 그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마당에 있던 소나무만 파내어 새 집에 옮겨 심었다. 이 소나무는 그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 당 대표였던 한화갑씨가 울산까지 와 직접 그의 마당에 심었던 나무였다.

칠순 중반을 넘어선 그는 지금도 민족전통인술세계화운동본부 총재와 울산독립공원추진본부장을 지내면서 우리의 전통인술을 세계화하고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최근 꾸민 ‘약선새마을운동’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귀농과 귀촌 사업의 성공적인 모델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자연치유와 휴양관광 복합단지 조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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