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울산왜성(蔚山倭城) 제2편
울산읍성·경상좌도병영성, 울산왜성으로 뜯겨가다

▲ 다몬야쿠라(多門櫓)와 도베이(土塀)의 사례(일본 히메지성).

울산왜성, 급경사에 기댄 철옹성
2단의 흙담과 1단의 다문로로 구성
곽재우 “함락시킬수 없는 견고한 성”
왜성 축성하던 1597년 음력 11월
맹추위에 석재·목재 수급 어렵자
울산읍성·병영성 철거, 축성재료로

울산왜성은 동해안으로부터 태화강을 따라 약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동천강과의 합수부에 솟은 작은 구릉에 위치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만조 시 바로 구릉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이쳤다. 성(城)의 입지로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독립된 구릉, 혹은 야산을 택하는 것은 비단 울산왜성뿐만 아니라 국내의 대다수 왜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먼 바다를 건너 침략해 왔던 왜군의 입장에서는 본국에서의 보급이나 연락, 유사시의 퇴각에 있어서 선박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에 손쉽게 배를 댈 수 있는 선창의 확보는 곧 생명선을 담보하는 일이었고 성곽 입지의 첫째 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유재란 당시 울산왜성의 규모와 축성 상황은 공사 책임자였던 왜장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가 작성한 <울산지어성출래사목록(蔚山之御城出來仕目錄)>과 감독관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의 부장 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가 지은 <조선물어(朝鮮物語)>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 울산왜성 본환 동문지에서 출토된 병마절도사선정비 활용 문둔테석(확돌).

현재는 도심 가운데의 숲이 우거진 학성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1597년 축성 당시에는 급경사에 기대어 비스듬하게 쌓아올린 높은 성벽과 다시 그 위에 담(벽, 塀)을 둘러친 철옹성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견고했던지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이 성에 대해 ‘가토 기요마사가 수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함락시킬 수 없는 성을 쌓았는데, 비할 데 없이 견고하다. 끊어진 산을 이용하여 성을 쌓으니 매우 교묘하여 평지 가운데 생긴 한 개의 산성’이라고 하였다.

울산왜성은 전체가 크게 3개의 단(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아래쪽 단을 3지환(三之(の)丸, 산노마루), 가운데를 2지환(二之丸, 니노마루), 최정상의 단을 본환(本丸, 혼마루)이라고 한다. 왜성(倭城)에서의 단(段)은 적이 쳐들어 올 때,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전투하도록 하여 방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구축된 것인데, 이를 총칭하여 곽(郭) 또는 곡륜(曲輪)이라 하고 ‘쿠루와’로 발음한다. 그리고 이들 쿠루와 중에 주된 단(段)을 환(丸)이라고 부른다. 현재 울산왜성의 2지환(二之丸, 니노마루)과 본환(本丸, 혼마루) 사이 동쪽 아래에서 별도의 곡륜(曲輪, 쿠루와)터를 살펴볼 수도 있다.

▲ 울산왜성에서 확인한 전(塼, tile).

한편 성벽 위에 설치하였던 담(塀)은 2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작은 기와 조각을 포함한 흙을 다져 쌓은 흙담(土塀, 도베이)이 있고, 지붕을 올린 회랑(복도)형식의 건물을 만든 뒤 판벽으로 감싼 다문로(多門櫓, 다몬야쿠라)가 있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적의 공격에 대해 몸을 숨길 수 있는 방어막이 된다는 점에서 기능이 유사하지만, 비(雨)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몬야쿠라가 훨씬 효율적이다. 이렇게 간단한 구조의 ‘도베이’ 대신 일정 구간에 ‘다몬야쿠라’를 조성하는 이유는 조총(鳥銃)을 사용할 때 비에 화약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울산왜성의 다몬야쿠라는 2지환과 3지환에 둘러친 ‘도베이’와는 달리 최종 방어선인 본환(本丸, 혼마루)에 주로 두었는데, 이는 본환으로서의 최고 위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울산왜성의 축성공사가 이루어지던 1597년 음력 11월은 겨울 추위가 극에 치닫던 때로 성곽공사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수급이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왜군들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적군(敵軍, 여기서는 조선군)의 성곽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당시 울산읍성과 경상좌도병영성의 성벽 등 여러 석재와 건물들을 철거하여 왜성의 축성재료로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鶴城誌, 1749)>, 성곽 조(條)에는 ‘선조30년(1597) 왜구(倭寇)가 군성(郡城, 울산읍성)을 깨뜨리고 헐어 돌을 옮겨서 증성(甑城, 울산왜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015년 울산왜성 본환 동쪽 문지(門址, 문터) 발굴조사 중 ‘…절도사신공응기선정비(…節度使辛公應基善政碑)가 출토되어 울산 경상좌도병영성의 석재가 울산왜성의 축성에 사용되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80년대 초반 울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해 있던 신응기(辛應基)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인데, 1585년 12월 병영성에 세워진 것이다. 한편, 이 비석은 2015년 울산왜성에서 출토될 당시 둥근 구멍이 파져있는 상태였는데, 이는 성문의 문짝(門扉)을 여닫기 위해 받치던 문둔테석(확돌)의 구멍으로 전쟁에 임하는 왜군들이 병마절도사의 상징물을 딛고 조선군을 철저히 유린하고자 했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외에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최근 울산왜성 본환 주변에서 찾은 두께와 크기가 서로 다른 2장의 바닥 전(塼, 타일, tile)이다. 바닥 전(塼)은 마루도 온돌방도 아닌 신발을 신은 채 사용할 수 있는 건물 내부공간의 바닥에 포장하는 정사각형의 타일(tile)이다. 고대의 전(塼)은 탑(塔)에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조선초기에는 대부분 건물의 바닥에 사용하는 용도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곽의 장대(將臺)나 사당(祠堂) 등 의례용 건물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하나의 공간에 사용되는 전(塼)은 일시에 시공하고 규격화되어있기 때문에 그 크기가 같다. 따라서 울산왜성에서 발견된 두께 5.3㎝와 3.8㎝의 서로 2장의 전돌 조각은 각각 다른 건물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닥 전(塼)을 발견한 곳이 울산왜성의 수장이 머물렀던 본환인 것을 염두에 두면, 이들 바닥 전(塼)은 울산읍성과 경상좌도병영성의 중심건물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성곽 내에서 가장 의례적인 건물로는 임금의 전패(殿牌)를 봉안한 객사의 전청(殿廳, 正廳)을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전돌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2장의 바닥 전(塼)은 각각 울산 객사의 학성관(鶴城館)과 경상좌도병영 객사의 제남관(制南館)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원래의 자리에서 사라진 조선초기 울산읍성과 경상좌도병영성의 흔적이 왜군이 쌓았던 울산왜성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3개의 성곽이 역사적 사실로 엮여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콘텐츠 요소를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