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인간관계서 갈수록 비중이 커지는
법은 과연 만능의 해결사일까?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도 예외없이
대화·신뢰보다는 법이 우선인 세상
촘촘한 법망엔 人情의 틈이 없다

가족이 좋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주기 때문이다. 밖에서 저지른 실수나 손실로 의기소침해져도 가족은 이를 나무라기보다는 따뜻하게 감싸고 재충전하는 베이스캠프가 된다. 세상에 우리를 이렇게 무조건 받아주는 곳은 가족밖에 없다.

서로 아껴주는 가족은 손익을 따지지도 법과 규칙을 들먹이지도 않는다. 손익 계산과 규칙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데다 삶의 복잡한 상황에 일일이 적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가족을 지탱하는 포용과 배려심은 일견 허술해 보이지만 실은 어떤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는 효율적인 의사결정 방식이다. 예전에는 이런 방식의 인간관계가 이웃과 친구, 심지어 직장에도 널리 배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주위사람들의 처지와 기분에 관심을 가지고 온정을 베풀거나 오지랖 넓게 관여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사적인 관심이나 간섭은 부담스럽다. 혼밥과 혼술이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고 있지 않은가? 사람간의 배려심은 점점 엄격한 법과 촘촘한 규칙들이 대신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보와 희생을 전제하는 배려심보다는 시비를 가려서 갈등을 조정하는 법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가족이라고 해도 그 기능을 상실하면 결국 법에 의지하게 되니 법은 결국 모든 갈등의 최종 도착지가 된다. 최근에 몇 개월간의 대규모 시위를 잠재운 헌재의 대통령 탄핵 결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법의 위력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이젠 법과 원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만 같은 기대도 하게 된다.

이런 국민들에게 정치인들은 법과 원칙을 바로세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를 실제로 지키기는 쉽지 않다. 현실의 문제들은 법처럼 단순하지 않고 예측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몇 가지 원칙을 불변의 가치인 양 주장하다가는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번에 새 정부가 내세웠던 5대 비리 원천배제 인사원칙의 벽을 대부분의 후보자가 넘지 못한 것은 원칙과 현실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

법은 과연 만능 해결사일까? 삶의 미묘한 문제도 법이 해결해줄까? 기대와는 달리 사소한 문제를 법대로 하자고 했다가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운전 중 시비가 생기면 차를 발로 차고 언성을 높이다가, 급기야 법정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한밤중에 층간소음으로 다투다가 경찰이 출동하고 맞고소로 번지기도 한다. 모두 눈맞춤도 없이 먼저 화부터 내다가 커지는 사건들이다. 마주보고 대화로 풀면 될 일을 성급히 법적 방법부터 찾다가 귀한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화병까지 도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법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의료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의사 환자 관계도 신뢰관계에서 계약관계로 급속히 변하고 있다. 의료 제도는 투명하고 공정한 계약관계를 위해서 진료 관련 정보를 더 많이 공개하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의약분업 이후 환자에게 처방전이 발급되었고, 이후에 복약설명서 제공이 추가되었으며, 올해부터는 병원 종사자의 명찰 패용이 의무화된다.

문제는 의료라는 전문 영역의 특수한 속성이다. 의료에서 정보 제공은 꼭 필요하나 그 한계도 뚜렷하다. 환자는 주어진 정보가 아무리 늘어나도 자율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자세한 복약설명서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험회사의 약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 약한 환자들은 건강염려와 불안이 깊어진다. 암시를 받아서 설명서에 예시된 부작용을 실제로 호소하기도 한다. 전문가의 판단과 설명이 꼭 필요한 이유다.

환자는 전자제품 사양을 비교하듯이 의사를 비교하고 고를 수도 없다. 소문난 명의가 실제로 임상 진료 능력이 뛰어난지, 또 자신을 가장 잘 진료할 의사인지도 알 수 없다. 실제 진료는 의사의 전문 지식과 경험뿐 아니라 환자와 신뢰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려는 선한 의지가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자는 겉보기로 의사를 쇼핑하기 보다는 자신의 증상과 궁금증을 솔직히 표현하고 의사와 신뢰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들도 법의 영향을 받는다. 법규가 지나치게 까다로워지면 의사들은 선한 의지가 위축되어 방어진료를 하는 경향이 있다. 치료나 수술의 성공률이 높지 않으면 치료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려고 하고, 법적 문제를 막기 위해서 이상이 발견될 가능성이 희박한 검사를 추가로 하게 된다. 촘촘하게 짜여진 법망이 원래의 의도와 달리 따뜻한 마음이 우러날 틈마저 봉쇄해버리는 것이다.

법 만능시대에 인간관계의 고유한 영역마저 법으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주위를 돌아본다. 다행히도 회색 도시는 곳곳에 한 뼘의 자연을 허용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 단지의 정돈된 화단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란 금계국이 삐죽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다. 보도블록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수 밑둥에는 보라색 송엽국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오늘따라 이들 야생화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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