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중략-

빼놓은 마음을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 엄계옥 시인

다프네를 향한 아폴론의 사랑이 그러했듯, 그들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남자는 무슨 연유로 저토록 지순한 여자를 외면했는지.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라는 시가 좋아서 산 시인의 시집들은 온통 투쟁 투성이었다. 못난 사회가, 실연의 아픔이 투사로 만든 건 아닌지. 의외로 ‘관계’는 한 사람을 향한 지심이 깊은 시였다. 그 지심은 혼자서는 뽑을 수가 없다. ‘지울 수 없는 얼굴’ 만이 뽑을 수가 있으니. ‘아흔 아홉 번의 편지를 쓰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 하고 으르고 협박하고 애원해도 끝내 마음을 다른 데에 두고 온 남자. 한사람을 향한 맹목이 너무 깊어서 안타깝다. ‘사랑을 고치는 약은 없다. 만약에 있다면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데이비드 소로)’ 지상에서 상한 영혼, 지하 세계에서는 자유로웠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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