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95)울산출신의 전국구의원들

▲ 신병렬 의원은 울산 출신 최초의 전국구 의원으로 12대국회 동안 김영삼과 김대중의 정계은퇴를 주장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했다. 그는 요즘 울주군 삼동면 출강리 별장에서 소일하고 있다.

신병렬 의원, 오위영 의원 비서 출신
12대 정치계 첫발…야당 기수로 활약
김운환 의원, 13·14대 국회의원으로
범서~경주 24호선 확포장 문제 해결
이장희 의원, 14대때 비례대표 당선
당내 마당발로 민주-평민 합당 도와

우리나라 헌정사에 전국구 의원이 처음 나타난 것은 8대 총선 때부터다. 이 때 공화당 정부는 국회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여야 득표수에 따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선거 없이 선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전국구 제도는 처음 취지와 달리 여당의 경우 논공행상에 따라 인물을 뽑았고 야당은 소위 말하는 공천 헌금을 받는 수단으로 이용해 폐단이 적지 않았다.

울산은 그동안 신병렬, 김운환, 이장희 의원 등 3명의 전국구 의원을 배출했다.

신병렬 의원이 정치에 뛰어든 것은 4대 총선에서 울산 출신 오위영 국회의원의 비서가 되면서다. 삼동 출신인 신 의원은 4대 총선 무렵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 온천장에 있던 주유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오 의원은 선거구를 울산에서 부산으로 옮겨 동구에서 출마했으나 자유당의 엄청난 탄압을 받있다. 이 때 신 의원의 고등학교 선배가 그를 오 의원에 소개해 선거운동을 도왔다.

신 의원은 4·19로 제2공화국이 들어선 후 오 의원이 장면 정부의 실세가 되었을 때도 보좌관으로 그를 도왔다. 그러나 5·16으로 장면 정부가 막을 내리면서 그도 한동안 정치를 떠나 무교동에 ‘오륙도’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운영했다.

그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때가 12대 때다. 이 때 평소 친분이 있었던 대구 출신 신도환 국회의원의 추천으로 야당 몫의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그는 비록 전국구 의원이었지만 국회에서 선명 야당의 기수로 활약했다.

12대 총선은 5공화국 이후 전두환 정권의 시녀 노릇을 했던 제1야당 민한당이 무너지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밀었던 이민우 총재 중심의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던 선거였다. 이 때문에 총선 후에는 이민우 총재의 입지를 놓고 당내 논쟁이 자주 일어났다.

이 때 신 의원은 야당의 발전을 위해 김영삼과 김대중 등 구시대 인물이 물러나야 한다는 발언을 해 당내에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젊었을 때부터 정치를 익혀 배짱이 좋았고 유단자로 체력이 튼튼했을 뿐 아니라 재정이 탄탄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 중에는 그에게 지역구 출마를 권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는 13대 총선부터 울산에서 지역구의원으로 출마 기회를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 의원은 정치를 떠난 후 한동안 서울에 머물렀지만 1992년 울산매일신문사 회장직을 맡아 울산에 자주 왔다. 그러나 신문사를 그만 둔 후 다시 서울에서 생활했던 그는 최근에는 고향 삼동으로 와 다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다.

신 의원의 비서가 1987년 6·10항쟁 때 울산 야당의 선두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조동환씨다. 신 의원이 정치에서 물러난 후 조씨 역시 정치를 떠나 울산에서 건설업을 해 돈을 많이 벌었지만 지난해 갑자기 서거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운환 의원은 전국구 의원으로서는 울산에서 가장 출세했던 인물이다. 영광이 컸던 만큼 골도 깊었다. 1946년 울산 동구 서부리 출신으로 남목초와 방어진중, 울산농고를 졸업했던 그는 3사관학교 1기다.

육군 소위로 부산에서 군복무 중 동아대학 정치학과를 다녔던 그는 제대 후 아파트 사업을 울산에서 벌여 돈을 많이 벌었다. 이 때 울산의 야당인사였던 임종식씨 소개로 김영삼의 직계라인이었던 서석재 의원을 통해 통일민주당 전국구 11번으로 13대 때 국회로 진출했다.

이후 울산 중구 우정동에 사무실을 내고 14대 때 울산 출마를 결심하고 지역 활동을 열심히 했다. 13대 국회에서 건설 분과위 소속이었던 그는 전국구 의원이었지만 울산의 도로 개설에 정성을 쏟는 등 일을 많이 했다.

그가 13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만 해도 범서에서 경주로 빠져나가는 국도 24호선은 일부가 확포장 되지 않아 도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구룡 마을에서 경주 경계인 관문성까지는 도로가 좁아 주민들의 불편이 컸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들은 도로 확포장을 위해 지역 출신의 박진구 의원을 찾아가 자주 협의했지만 박 의원이 예산부족을 이유로 사업을 미룰 때가 잦았다.

이 때 마을 주민들이 찾은 국회의원이 김 의원이었고 김 의원이 이 일을 해 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시 김 의원의 공적을 기려 도로 옆 새터 마을에 공덕비를 세웠는데 그 비석이 지금도 있다. 이후 김 의원이 14대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에 출마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버스를 대절해 해운대까지 가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13대 때는 전국구 의원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이 추진했던 평화댐 건설의 문제점을 조사한 후 언론에 터뜨리는 등 야당의원으로서 정부 정책을 신랄히 비난해 명성을 떨쳤다. 노태우 정권 때 있었던 3당 합당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3당 합당 후 김영삼계가 이끄는 민주당 의원들은 자주 민정계 의원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 때 마다 김 의원은 공개적으로 민정계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민주계의 탈당을 부추겼다.

이 때문에 그는 민자당 내에서도 민주계의 버팀목이 되어 김영삼 총재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김 총재의 이런 신임으로 14대 총선 때는 부산 해운대구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선거에 자신감이 없어 부산 출마를 망설였는데, 이 때 김영삼 총재가 “이번 선거는 자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이니 자네는 이름만 걸면 된다”고 호통을 쳐 마음을 굳혔고, 선거 결과 당선되었다.

14대 총선 8개월 뒤에 있었던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는 명실상부 여당의 실세가 되었다. 한동안 민자당 조직발전특위 위원장 자리를 맡기도 했던 그는 여세를 몰아 15대 총선에서도 해운대에 출마, 이기택 통일민주당 후보와 맞붙어 승리했다. 내리 3선 국회의원으로 당내 중진이 된 그는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광은 이 때까지다.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후보로 출마,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했던 그는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의회를 떠난 후에는 국회의원 시절 벌인 각종 개발 사업으로 뇌물수수 죄목으로 여러 번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이후 그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한동안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이장희 의원은 울산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울산 범서 구영리 출신인 그가 정치에 관심을 보인 것은 최영근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을 하면서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신병렬 의원이 경영했던 ‘오륙도’ 식당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곳에서 이기택 의원을 만나 이 의원과 친하게 되었다.

이후 건설회사를 차려 돈을 많이 벌었던 그는 이 의원으로부터 국회의원 출마를 여러 번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다가 14대 때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비록 국회의원을 한번 밖에 못했지만 당내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 ‘마당발’로 통했다. 그가 활동했던 14대 때는 이기택이 이끄는 민주당과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이 합당을 하게 되는데 양당이 합당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커 자연히 당내에서 중진대접을 받았다.

그는 당내 인맥도 두터워 김영삼 정권 때 총무처 장관을 지냈던 서석재 의원과 나중에 국회의장까지 지낸 박관용 의원이 동아대학 동창이고 최형우 장관은 부산공고 한해 후배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런 정치적 배경 때문에 그는 울산에 총선이 있을 때 마다 울주군 출마를 권유받았지만 권기술 의원을 의식해 이를 거절했다.

최영근 의원 아래서 권 의원과 함께 정치를 배웠던 그는 정치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 의원의 문하생으로 함께 정치를 배웠던 권 의원이 울주군 출마를 포기하지 않는 한 자신이 이 지역에서 출마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면서 끝까지 출마하지 않았다.

그가 국회에서 활동을 할 때는 울산의 광역시 승격이 국회에서 다루어질 때인데 특히 그는 야당의원으로 울산광역시 승격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5공 시절에는 그의 형이 울산에서 안기부 소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소일하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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